신간 산책

등록일 | 2021.04.30 조회수 | 482

[소설MD 추천 신간] 할머니, 그럼 엄마는 도망친 거야?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순간,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나요? 남을 탓하시나요, 아니면 나를 탓하시나요? 그것도 아니면 없었던 일로 치부하시나요?

베일리와 레니는 아빠의 이름을 모릅니다. 처음부터 몰랐습니다. 엄마는 레니가 한 살 때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습니다. 베일리와 레니 자매는 우리 집은 왜 다른 집과 다른지 할머니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엄마는 어디에 갔어? 언제 와?

할머니는 언제나 엄마가 곧 돌아올 거라고 대답합니다. 할머니의 딸인 엄마는 대대로 우리 가문, 주로 여자들을 괴롭혀 온 특별한 ‘기질’을 타고 났기 때문에 떠난 것이지만, 할머니의 고모가 그랬듯이 돌아올 것이라고 확언합니다.(할머니의 고모는 20년 만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마치 엄마가 슈퍼에 간 것처럼, 해가 지기 전에는 당연히 돌아올 것처럼 평소와 다름 없이 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16년째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은 안 걸려?”

열 살 때 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 병’을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 할머니와 함께 강에 수영하러 가던 길이었다.

“물론 남자들도 걸리지.”

할머니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내 두 손을 그러쥐더니 드물게 엄숙한 투로 말했다.

“좀 더 커야 이해할지 모르겠다만, 레니, 이런 식이란다. 남자가 그걸 걸려 봐야 사람들은 잘 몰라. 우주비행사니, 조종사니, 지도 제작자니, 범죄자니, 시인 따위가 돼서 자기가 아빠가 됐는지 알기도 전에 떠나버리곤 하니까. 여자가 걸리면, 뭐, 복잡해지지. 그냥 달라.”

“뭐가? 어떻게 다른데?”
“글쎄, 엄마란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자기 딸들을 돌보지 않는 경우는 잘 없잖니?”

정곡이었다.

“너희 엄마는 그렇게 타고난 거야. 내 자궁에서 곧장 세상으로 뛰쳐나간 거나 다름없지. 처음부터 줄곧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던 거야.”
“도망치는 거야?”
“아니야, 얘야. 결코 도망이 아니야. 그건 알아두렴.”

할머니가 내 손을 꽉 쥐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거지.”

- <하늘은 어디에나 있어> 본문 중
 
어린 자매는 할머니를 백 번 졸라야 겨우 한 번 들을 수 있는 엄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엄마는 콜롬버스 같은 탐험가’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환하게 웃습니다. 엄마는 세상을 탐험하러 떠났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환상적인 모험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잠들기 전 자매는 오늘은 엄마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지 상상합니다. 오늘 엄마는 이탈리아에 있어. 어제도 이탈리아에 있었잖아! 그럼 오늘은 로마로 할까? 둘에게 엄마는 소설 속 주인공이나 신화 속 영웅과 다르지 않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나쁘지 않습니다. 엄마는 이야기 속에서 자유롭고, 아무리 깜깜한 밤에도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는 서로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라일락 향기가 흐드러지던 봄, 베일리가 죽습니다.

4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4시 48분
언니는 줄리엣 역으로 리허설을 시작한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
놀랍게도 시간은 언니의 심장과 함께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학교에 가고 일터에 가고 식당에 갔다.
클램 차우더에 크래커를 으깨 넣고
시험 때문에 초조해하고
차 안에서 노래를 불렀다.
신이 저지른 끔찍한 실수의 증거처럼,
비는 몇 날 며칠이고 우리 집 지붕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깰 때마다 나는
그 지칠 줄 모르는 두드림에 귀 기울이고
창문 너머로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봤다.
적어도 태양은 우리에게 코빼기도 안 비출 만큼
염치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으며.

- <하늘은 어디에나 있어> 본문 중

부검 결과 타고난 심장의 문제였다고 결론이 나고, 할머니는 레니를 병원에 데려갑니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말합니다. “레니, 넌 운이 좋구나.” 레니는 의사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 대신 울기 시작합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하필 운 좋은 심장을 가져서요. 레니가 원한 것은 언니와 똑같은 심장이었습니다.

그 후 시간은 흐릿하게 지나가고, 레니는 할머니를 원망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죠? 어떻게 둘 다 날 떠나게 할 수 있죠? 레니는 매일 대화를 청하는 할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습니다. 언니의 서랍장 위에 흩어진 껌 포장지와 까만 머리카락이 그물처럼 엉킨 빗, 의자 등받이에 걸쳐진 옷가지, 침대 기둥 위에 걸린 수건, 빨래 바구니에 쌓인 옷들. 언니가 떠난 아침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방에 틀어박힐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레니에게 말을 겁니다. 언니의 애인이었던 토비도, 파리에서 전학 온 남자애 조도, 동네 빵집 주인도, 밴드부 음악 선생님도. 레니는 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하늘은 어디에나 있어>(잰디 넬슨/ 밝은세상/ 2021년)는 열일곱 살 레니의 시점으로 서술됩니다. 지독한 상실의 고통과 첫사랑의 강렬함을 오가며 숨 쉴 틈 없이 진행되는데, 마치 다시 십대가 된 듯 격렬한 감정 변화를 경험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거기에다 레니의 눈으로 보게 되는 워커가(家) 여자들의 이야기에선 사회적 서사가, 고통과 설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춘기 소녀의 모습에선 사랑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 휘청거리면서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에서는 살아가는 자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됩니다. 레니의 주변 인물들도 놓칠 수 없는 매력 포인트인데, 이 부분은 책에서 꼭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렇다 할 마케팅 없이 미국의 작은 도시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잰디 넬슨의 데뷔작입니다. 10대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에는 팬덤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 후 미국청소년도서관협회 최고의 영어덜트 소설로 선정되었고 퍼블리셔스위클리 플라잉스타, 혼북팡파브, ABC뉴보이스, 시카고공공도서관 등 주요 매체와 기관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히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영화 '미나리' 포스터

영화 '문라이트' 포스터

그 인기를 증명하듯 '미나리', '문라이트' 등 시의성 있는 작품들을 제작해온 미국 영화사 A24에서 이 책을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고, 잰디 넬슨은 직접 대본 작업을 진행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고 합니다. 곧 영화로 만나볼 수 있다고 하니 원작과 비교해서 보는 즐거움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기발하며, 열정적이고, 유머러스한 이 책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10대 청소년, 청소년기 자녀를 둔 부모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추천하는 소설입니다. 강제 집콕과 미세먼지로 답답한 마음을 향긋한 청량감으로 씻어내 줄 따스한 이야기니까요. 제가 느낀 행복의 기운을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글 : 이화종 인터파크도서 소설MD(kara@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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