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터뷰

북&인터뷰 등록일 | 2021.04.26 조회수 | 998

‘장소애호가’ 박성진 “봄에는 철물점에 가보세요”

※ <모든 장소의 기억>(박성진/ 문학동네/ 2021년)가 출간됐습니다. 문학동네 편집부가 박성진 작가와 진행한 인터뷰를 북DB 독자들을 위해 이곳에 옮깁니다. – 편집자 말

Q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 책은 어떤 책인가요? 

오랫동안 건축 잡지 ‘공간SPACE’에서 일하면서 국내외 유명 건축가들의 화려하고 예술적인 건축물을 많이 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저는 실제 제 일상이 일어나는 평범하고 사소한 공간들의 의미를 더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음식으로 비유하면 오성급 호텔의 미슐랭 레스토랑보다 집 주변 골목길의 흔한 백반집이 제게 더 소중했던 것이죠.  

그래서 예술과 학문이 아닌 내 일상 속의 공간과 장소는 어떤 모습일지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지하철, 병원, 대형 마트, 편의점, 카페, 문방구, 철물점, 버스 정류장 등. 3년 전부터 주변의 사소한 공간과 장소에 관한 기억과 감정을 글로 남겼습니다. 진부한 줄만 알았던 장소는 다양한 감정과 사건으로 가득했고, 굳게 잠겨 있던 아주 오래전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났죠. 이 책은 우리 곁에 있는 일상적 공간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 가는 감성의 가이드북입니다.

Q 책에서 언급한 공간 중 가장 사랑하는 곳, 가장 기억에 남는 곳, 가장 쓸쓸한 곳 세 곳을 꼽아주신다면? 그리고 그 이유는?

사랑하는 곳이라면 저와의 정서적 교류가 중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고속도로 ‘휴게소’를 사랑합니다. 휴게소가 가지고 있는 장소적 고립감과 분리감이 여정 중인 저에게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킵니다. KTX나 비행기를 타면 금방 갈 출장도 휴게소 때문에 가끔 일부러 차를 타고 갑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호텔이 있다면 저는 아무 생각 없이 하루 묵고 싶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가판대’입니다. 새해 첫 출근, 첫 미팅인데 상대에게 바람맞고 멍하니 카페에 앉아 있었죠. 그때 유리 넘어 작은 가판대가 눈에 들어왔어요. 갑자기 그 안쪽 세계가 미치도록 궁금해 삼사십 분 동안 그곳을 몰래 관찰하면서 한 평도 안 되는 그 안으로 깊게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카페를 나와 그곳 주인에게 가판대 안은 어떤 공간인지 실제 묻기까지 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가장 쓸쓸한 곳은 포장마차입니다. 책에서도 ‘외로운 낭만’이라고 표현했는데, 창덕궁의 긴 담벼락을 끼고 홍등처럼 밝혀진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어요. 그곳이 문학적 의미에서 가장 쓸쓸한 장소라고 느꼈습니다. 풍경도 그랬지만 정작 더 쓸쓸했던 이유는 포장마차 속에서 어설프게 겉돌고 있던 제 자신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Q 장소애호가로서, 봄에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그리고 독자들에게 추천해줄 장소는?

봄이면 어쨌든 철물점에 가야 합니다. 대형 마트나 아파트 단지에 있는 철물점 말고 교외에 있는 큰 철물점에 한번 가보세요. 봄이 되면 시작될 여러 외부 활동에 맞춰 여러 장비와 기구, 자재를 구비하고 있는 건 물론이고, 석재, 잔디까지 다 갖추고 있습니다. 봄날의 철물점은 지난겨울 얼어 있던 저의 판타지를 꾸물꾸물 다시 피어오르게 만듭니다. 그곳의 온갖 장비와 물건을 보고 있자면 이미 새로운 집 한 채가 뚝딱 지어지고, 우리 집 마당의 울타리와 계단이 세워진 느낌이랄까요.

Q 식도락이나 패션에 대한 취향, 애호와 달리 우리는 공간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거나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변화가 가능한 곳들도 많죠. 약간의 변화만으로 더 좋은 장소가 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제안할 것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장소가 있나요?

저는 지하주차장을 볼 때마다 진한 아쉬움 속에 이상한 상상력이 발동합니다. 차들이 빠져나간 유휴시간대에 지하주차장에서 테니스를 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꼭 테니스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넓은 실내공간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나 운동은 많으니까요. 지하주차장은 추운 겨울이나 비가 올 때에도 활동 가능한 실내체육관처럼 쓸 수 있습니다. 특히 도심 주차장은 새벽이나 저녁에 텅텅 비어 있습니다. 빈 시간대에 지하주차장은 문화적으로 새로운 잠재력을 갖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계 중심의 기능적 배치와 환경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조금만 관점을 달리해 접근하면 지하주차장을 지상의 멋진 장소처럼 특색 있는 곳으로 바꿀 수 있을 텐데요.

앞서 이야기한 철물점도 흥미롭습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도구와 장비만 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플라워카페, 북카페가 있듯이 철물점과 카페를 결합해보면 어떨까 가끔 생각합니다.

Q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한국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장소가 있을까요?

사실 거의 모든 공간과 장소가 한국만의 문화적 특질이 반영된 고유한 환경일 겁니다. 그 중에서도 코로나만 아니면 제가 매월 즐겨 찾을 목욕탕이야말로 한국적 장소죠. 가족이나 친구, 지인과 함께 알몸으로 탕에 들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 한국식 이태리타월로 때를 미는 것도 매우 독특한 장소의 문화입니다. 찜질방도 목욕탕과 한국의 온돌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공간입니다. 또 고속도로 휴게소도 한국처럼 복합적이고 활발한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휴게소는 먹거리 천국이며, 어떤 경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Q 다음에 체험해보고 싶거나 더 알아가고 싶은 장소는?

이번 책에도 등장하지만, 건물에서 로비라는 공간을 좀더 깊게 탐구하고 싶습니다. 정글이나 오지를 탐험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도심의 대기업 로비에 은밀하게 잠입해 그 로비의 구조나 특유의 분위기, 주변의 감시와 개방성,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 등을 관찰하고 싶어요. 기업의 문화가 도시와 만나는 곳, 기업과 건물의 첫인상을 심어주는 곳, 로비는 단순한 통과공간 그 이상입니다. 기업의 문화와 분야에 따라 로비는 각양각색의 분위기일 것 같습니다.

Q 코로나19는 우리의 공간 체험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요? 그리고 앞으로 우린 공간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까요?

코로나19 때문에 우리는 일상의 평범한 공간들을 더욱 갈망하고 있습니다. 숨쉬듯 당연하게 누려온 공간들이 통제되고, 우리는 좁은 상자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의 일상 속에선 오히려 코로나19 때문에 우리는 공간으로 더 깊고 무겁게 침잠하게 되었습니다. 움직임에 제약은 생겼지만, 더 오래 그리고 깊이 머물러야 하는 공간에 애착과 고민이 생기는 것이죠. 공간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코로나19가 일상 공간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태도를 바꿔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진 : 신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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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박성진

공간과 건축에 관한 온갖 것을 기록하고 기획한다. 책, 전시, 영상, 교육, 투어는 물론이고, 공간에 필요한 프로그램과 콘텐츠를 만든다. 디자인과 설계는 절대 안 한다. 스페인 유학 후 건축 잡지 〈공간SPACE〉 편집장으로 일했고, 지금은 독립하여 사이트앤페이지(site & page)에서 장소와 책에 관한 낭만적 상상을 일삼고 있다. 부업으로 친구들과 프로젝트그룹 초현실부동산도 운영한다.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적 도구로서 건축을 애지중지 품에 안고 산다. 쓴 책으로 『모던스케이프』 『언젠가 한 번쯤, 스페인』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 『문화를 짓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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