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5.06 조회수 | 972

미국인 손녀가 ‘해님 달님’ 이야기를 만났을 때

태 켈러의 2021년 뉴베리상 수상작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에는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사람처럼 걷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동화가 나온다. 첫 ‘한국식’ 도입부부터 살짝 이질감이 느껴진다. 우리에겐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가 더 친근하니까.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도 이 낯선 이질감은 느껴진다. 분명 우리가 아는 ‘해님 달님’ 동화인데, 주인공은 남매가 아니라 자매이고 처음에 나오는 건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다.

이 소설 속 해님 달님은 작가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설 끝 저자의 말을 읽어보면, 태 켈러는 어린 시절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옛날 이야기에 매료된 기억이 있었다. 한동안 이를 잊었다가 4분의 1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작가는 한국 옛날 동화를 다시 읽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왠지 모르게 이전에 들었던 이야기와 달랐다. 할머니가 이야기를 바꾸거나 지어냈을 수도 있고 이야기 자체가 변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작가의 기억 속에서 왜곡되었거나.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님 달님’과 같은 이야기는 여러 책이 나와 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이를 처음 접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다른 통로로 다시 읽거나 들을 수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한국어 문화권에 사는 아이들은 이 이야기들을 이루는 문화적 재료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튀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할머니를 통해 미국인 손녀에게 전해졌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어 문화권에서는 안 일어나는 변형이 일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미국인 손녀는 릴리이다. 릴리는 엄마 존, 언니 샘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다가 건강이 나빠진 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어린 시절 잠시 살았던 워싱턴 주 선빔이라는 마을에 온다. 그리고 어느 날, 한국의 옛날 이야기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마법의 호랑이가 릴리 앞에 나타난다. 옛날 옛적 할머니가 훔쳐간 것을 돌려주면 그녀를 낫게 해주겠다면서.

그리고 할머니가 훔쳐간 것은 별이 된 이야기들이다. 그 중에서도 슬프고 무서운 옛 이야기. 할머니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 할머니가 나한테 슬픈 이야기, 우리 한국 역사 이야기 하면서 울었어. 왜 우리는 나쁜 이야기 꼭 들어야 해? 나쁜 이야기는 그냥 없어지는 게 좋지 않아?” 이 나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우린 여기서부터 태 켈러의 어머니가 소설 <종군위안부>의 작가 노라 옥자 켈러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은 문화적 경계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릴리는 한국계 엄마와 유럽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고 자신이 어디에도 온전히 속해있지 않다고 느낀다. 영어 사용자이지만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꾸준히 한국어 단어들을 사용한다.(예를 들어 릴리는 할머니를 ‘Halmoni’라고 부르고 이 단어의 정확한 한국어 발음에 민감하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에겐 당연한 한국어 단어들이 괄호 안에 영어 표기와 함께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어가 영어 속에서 외국어가 되어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낯선 어색함과 자유로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책이다. 한국어 작가라면 단군신화의 웅녀를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변형시켜 자신의 호랑이 이야기에 넣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쓰기엔 너무 드러나는 소재처럼 느껴지니까. 하지만 켈러는, 그리고 릴리의 할머니는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릴리가 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순간 한국의 이야기와 문화는 영어와 미국 문화의 토양 속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자라면서 뻗어 나간다.

책은 릴리의 경험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그냥 환상인지 분명히 하지 않는다. 이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진짜로 중요한 건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힘, 그리고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승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여자들의 유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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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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