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3.17 조회수 | 1,117

게임 천재 초등학생...알고 보니 그녀의 엄마는 외계인?

게임과 SF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게임 역사 초창기부터 있었다. 당연한 일이 아닐까. 방금 키보드와 버튼을 두드리며 멋진 모험을 했는데, 이 성취가 현실 세계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니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게임에 화면 위의 디지털 이미지를 움직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면? 나의 기술이 정말 세상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는 닉 캐슬이 감독한 1984년 영화 ‘최후의 스타파이터’다. 주인공 알렉스는 시골 마을 트레일러 파크에 사는 남자아이인데 마을에 있는 유일한 아케이드 게임기인 스타파이터를 하다가 그만 신기록을 세운다. 알고 봤더니 스타파이터 게임기는 우주 저편에서 벌어지는 항성간 전쟁에서 싸울 전사를 기용하기 위해 외계인 센타우리가 지구에 심어놓은 기계였던 것. 알렉스는 우주로 날아가 진짜 우주선을 타고 사악한 침략자 세력과 맞서 싸우는데, 아, 지금 관객들에게 이 진짜 전쟁은 여전히 컴퓨터 게임처럼 보인다. 어쩔 수 없지. ‘최후의 스타파이터’는 컴퓨터 그래픽을 적극적으로 영화에 도입한 초기 시도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볼 때는 사실성에 집착하는 대신 복고적인 매력을 즐겨야 한다.

그 뒤로 게임과 SF를 엮는 시도는 조금씩 정교해졌다. 일단 게임이 다양해지고 발전했다. 그와 함께 게임에 대한 상상력의 영토도 점점 넓어졌다. 이제는 게임이 현실에서 완전히 분리된 도피라고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현실 세계와 SF적 상상력이 뒤섞이며 꿈틀거리는 회색지대가 태어났다. 얼마 전에 언급한 코리 닥터로우와 젠 왕의 그래픽노블 <게이머 걸>은 SF/판타지 공간 속 환상적인 모험을 다루고 있지만, 만화적 표현을 벗겨내면 그냥 사실주의적인 이야기다.

전수경의 <별빛 전사 소은하>는 ‘최후의 스타파이터’와 <게이머 걸>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 제목과 설정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별빛 속에> 생각이 조금 나기도 했는데 사실이더라도 그건 지금 여기서 언급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책은 현대 한국에 사는 소은하라는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 중심으로 돌아간다. 은하는 친구도 별로 없고 학교에서 외계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외로운 아이지만 유니콘피아라는 게임에서는 한 자릿수 등수를 유지하는 게임 천재 ‘별빛 전사’다. 그러니까 굉장히 모범적인 어린이 소설 주인공이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외로운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여기까지는 SF 어휘들이 조금씩 등장하긴 하지만 현실 세계의 이야기다. 하지만 어느 날 왼쪽 손목에 별무늬가 나타나고 은하의 엄마인 오세리가 지구에서 500만 광년 떨어진 행성 헥시나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장르 세계로 넘어간다. 엄마와 동료 헥시나인들은 지구를 테라포밍해 정복하려는 사악한 우월주의자들을 막으러 왔고 오래 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일당들은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리고 그 음모의 한가운데에는 유니콘피아가 있는 것 같다. 막 헥시나인의 초능력을 개발하기 시작한 은하는 이 음모에 맞서 싸우지만 이를 위해서는 게임 속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드 SF는 당연히 아니다. 인간형 외계인,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의 혼혈과 같은 구식 클리셰들이 그대로 사용된다. 엄마를 포함한 외계인들이 헥시나 향우회에서 만나 노는 걸 보면 소설이 어떤 유머를 지향하고 있는지 보인다. 아무래도 어린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니 이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했을 것이고 이 지점은 어쩔 수 없이 복고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가상현실과 스페이스 오페라를 연결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21세기적이다. 이미 보편화된 게임에 대한 21세기의 지식과 상상력이 스페이스 오페라의 드라마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화면 속 우주선을 파괴하는 것이 게임의 전부였던 ‘최후의 스타파이터’에서부터 우리는 정말 먼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몇십 년 동안 우리가 어떤 상상력을 계발하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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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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