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3.10 조회수 | 1,897

1980년대 일본 풍속과 욕망의 간접 체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추리소설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의 여자주인공 교코의 직업은 컴패니언이다. 그러니까 파티나 행사의 진행을 돕는 도우미 역할을 하는 젊은 여자들 중 한 명이다. 교코의 장래 희망은 파티에서 돈 많은 남자를 낚아 좋아하는 보석을 마구 사들일 수 있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참 얄팍한 욕망이지만 그만큼 정직하고 또 그 목표에 나름 열심이라 굳이 뭐랄 생각은 안 든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교코의 모델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홀리 골라이틀리라고 한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버전이라고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겠다. 트루먼 캐포티가 쓴 원작의 홀리는 영화 속 오드리 헵번과 많이 다른 사람이니까.

장편 추리소설이니 살인이 있어야 한다. 독자가 교코의 캐릭터와 컴패니언이라는 직업의 디테일, 밤비 뱅큇이라는 이름의 회사 분위기를 익히자마자 같은 회사 소속인 컴패니언 에리가 죽는다. 독극물을 먹었는데, 시체가 발견된 호텔방 문은 안으로 도어체인이 걸려있다. 자살이거나 자살로 위장한 밀실살인사건이다.

남자주인공이 등장한다. 형사인 시바타인데, 비중은 교코보다 크지만 캐릭터에 공은 조금 덜 들어가 있다. 이 사람은 알고 봤더니 교코 옆집으로 이사왔다. 갑자기 이웃이 된 두 사람은 함께 살인사건을 풀기 시작한다. 아무리 알리바이가 확인되었다고 해도 교코는 여전히 용의자인데 형사가 수사 중인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넘기고 수사현장에 데리고 가도 되나? 소설은 이에 대해 깊이 고민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사전정보 없이 책을 읽던 독자들은 교코와 시바타가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소설의 시대배경을 짐작하게 된다. 시바타가 문 밖에서 치는 대사를 들어보라. “아,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전화선이 아직 연결이 안 돼서요. 잠깐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고풍스럽기도 하여라. 아직 사람들이 유선전화에 묶여있던 시절에나 가능한 대사다.

책은 1988년에 나왔다. 일본 경제가 고속성장 중이고 사이버펑크 SF 작가들이 일본 문화가 지배하는 근미래를 상상하던 시절이다. 컴패니언이라는 직업도 이 소설이 나올 무렵엔 인기였지만 지금은 그냥 명맥을 잇는 정도라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크리스티 소설 수준의 과거다. 30여년 전인데, 해문에서 크리스티 소설이 나오기 시작한 게 1980년대이고 미스 마플이 주인공인 소설들은 대부분 1950~1960년대에 나왔으니까.

추리소설은 의외로 풍속소설로 기능이 만만치 않은 장르이다. 수많은 독자들은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풀기보다는 20세기 초중반 영국 상류사회의 사치를 간접체험하고 당시의 풍속을 구경하기 위해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는다. 시간여행 관광과 비슷하다. 다른 비장르소설도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추리소설에는 이 장르만의 장점이 있다. 살인사건 수사를 하면서 소재와 배경이 되는 세계를 대놓고 함께 탐구할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당시 첨단 유행과 상품들을 소설에 적극 반영하는 편이라 그림은 더 선명하다. 용의자 중 한 명이 ‘수천 개의 주소를 저장할 수 있는’ 최첨단 전자 주소록을 꺼내는 장면을 보라. 그 동안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1930년대 영국만큼이나 장르화된 시공간인 1980년대 일본을 사는 사람들의 풍속과 욕망을 구경할 수 있는 재미가 가장 큰 소설이다.

퍼즐 미스터리로는 어떨까? 일단 밀실 트릭 수수께끼는 황금기 이전에 이미 완성된 고전적인 트릭에 새로운 재료를 넣어 맛을 낸 깔끔한 변주이다. 현재 살인사건의 동기가 되는 과거 살인사건의 단서가 되는 다잉 메시지 수수께끼는 좀 잡다하다. 비영어권, 특히 일본 사람들에게 영어라는 언어가 어떤 언어인지 보여주는 사례랄까. 다잉 메시지와 관련된 추리물을 읽다보면 굳이 저렇게 이상한 퍼즐을 만드는 대신 그냥 정상적인 방법으로 메시지를 남기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소설도 그렇다. 소설 속 캐릭터들은 실제 사람처럼 행동하는 대신 종종 대놓고 추리소설 클리셰를 따라하는데, 장르 독자들은 이를 우스꽝스러운 매력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설들을 쓰다보면 결국 이 관습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책이 <명탐정의 규칙>이 아니었을까.

※ 3월 11일 밤 10시 듀나와 함께 하는 ‘미스터리 북클럽’이 유튜브 채널 '공원생활'에서 실시간 채팅으로 진행됩니다. 앞서 소개한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를 읽고 만나서 나누는 시간에 함께 해보세요.  –편집자 주

▶ 미스터리 북클럽 참여 하기 : https://www.youtube.com/watch?v=3k257pK5n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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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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