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3.03 조회수 | 611

잔인무도한 국제 스파이전에 말려든 엔지니어

에릭 엠블러의 <공포로의 여행>이 열린책들에서 최용준 번역으로 나왔다. 이로서 한국어로 번역된 엠블러의 책은 최소한 네 권이다. <공포로의 여행>,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 <무기의 통로>. 삼중당에서 나왔던 <무기의 통로>를 제외하면 지금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세 권이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직후에 쓰였고, 이 소설 도입부에 나왔던 터키 비밀경찰 지아 하키 대령이 역시 도입부에 나온다. 하키 대령의 묘사는 다소 비아냥으로 흘렀던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때보다 조금 더 관대한데, 아마 쓰다보니 정이 든 게 아닌가 싶다. 덧붙여 말한다면 하키 대령은 두 편 이상의 엠블러 소설에 나오는 유일한 캐릭터가 아니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의 주인공 찰스 래티머는 후기작 <인터컴 음모>에 다시 주인공으로 나오고 <보기 드문 위험>과 <경계의 이유>에는 소련 스파이인 잘레쇼프 남매가 등장한다. 이 정도면 엠블러의 모든 소설들이 에릭 엠블러 유니버스에 속해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과 비교하면 <공포로의 여행>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시대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된 1940년 초. 군수회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인 주인공 그레이엄은 무기 거래 계약을 위해 터키로 왔다가 막 영국으로 돌아가려는 중이다. 하지만 호텔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당의 습격을 받고 독일 정보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등장한 하키 대령은 사건을 설명하고 암살을 피하기 위해 그레이엄을 비밀리에 소수의 승객만을 태운 화물선에 탑승시킨다. 하지만 과연 비밀경찰이 신원을 확인했다는 이 사람들은 정말 겉보기와 같은 사람들일까?

그레이엄은 전형적인 엠블러 주인공이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해외 여행 경험도 많다. 자기 분야에서는 유능한 전문가이고 영리하다. 하지만 잔인무도한 국제 스파이전 속에서는 하찮은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 아마추어가 어쩌다 보니 여행 중에 유럽, 아니,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게임에 말려든 것이다. 은근히 히치콕 영화 주인공을 닮았다. 두 사람의 활동 시기도 겹치고 엠블러는 나중에는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니, 히치콕이 엠블러 소설을 한 편 정도 각색해도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엠블러는 히치콕 영화의 제작자인 조운 해리스와 결혼하긴 했다.

물리적 액션은 그리 많지 않다. 엠블러 자신이 그렇게까지 액션 묘사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소설 대부분은 1930년대 황금기 추리소설 전반부 같다. 그레이엄은 배 안에서 독일인 고고학자, 터키 담배상인, 프랑스인 사회주의자와 아내, 파리에서 온 댄서와 남편과 같은 사람들과 만나 어울린다. 이들 중 한 명 이상은 겉보기와 다른 사람이고 정체가 밝혀진 뒤로는 필사적인 마인드 게임으로 이어진다.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무엇을 선택해야 총에 맞을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긴 고민 뒤에 이어지는 폭력 묘사는 비교적 짧다.

소설의 시대배경인 제2차세계대전 초반은 엠블러의 집필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아직 유럽 대륙을 뒤덮는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각국은 앞으로 다가올 파국 앞에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이다. 그레이엄의 고민은 당시 유럽을 시대적인 분위기를 스파이 소설의 플롯 안에 압축시킨 것과 같다. 예의 바르고 정중하고 심지어 남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언제 잔혹한 폭력성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사람들.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 <디미트리오스의 가면>과 비교해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의 입장과 태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엠블러는 좌파에 기울었고 힘없는 개인을 희생자로 삼는 국가 시스템에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이런 거리두기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레이엄은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소설 중반 이후로는 자신의 안전과 영국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연결하기 시작한다. 이는 엠블러의 경력과도 일치한다. 엠블러는 이 소설을 쓴 뒤 입대했고 종전까지 군대에서 선전물과 교본을 썼다.

히치콕이 감독하지는 않았지만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노먼 포스터가 감독한 1943년작에서는 조셉 코튼이 주연이었고 (배우에 맞추어 캐릭터는 미국인이 되었다) 코튼이 오슨 웰즈와 함께 각본을 썼다. 웰즈는 하키 대령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75년엔 다니엘 만 감독, 샘 워터스톤, 빈센트 프라이스 주연의 캐나다 영화가 나왔는데. 그레이엄은 이번에도 미국인이고 시대는 현대로 옮겨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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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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