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2.24 조회수 | 1,307

장르물은 짜고 치는 게임…알면서도 모르는 척 읽기

뒤늦게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있다. 지금 7시즌 ‘컬트’ 후반까지 왔는데, 선정적이고 종종 잔혹하지만 아주 무섭지는 않다.

무섭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길이가 아닌가 싶다. 각 시즌은 기승전결을 갖춘 12회 전후 길이의 미니시리즈인데, 이 시리즈는 그 길이를 채우기 위해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상세한 사연을 준다. 그런데 공포의 대부분은 무지에서 나온다. 사연을 알게 된 뒤에도 여전히 혐오스러운 악당은 있지만 공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핸디캡은 6시즌 ‘로어노크’에도 있다. 잃어버린 식민지를 소재로 삼은 호러물은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를 제외하고도 많은데, 이들 중 어느 것도 소재가 되는 실화만큼 무섭지는 않다. 일정 길이의 호러물은 설정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을 하게 되는데, 로어노크 이야기의 매력은 설명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기 때문에.

잔인한 자극의 연속 때문에 재미있는 호러도 있다. 하지만 보다 섬세한 불길함과 뒤늦게 찾아오는 오싹함 때문에 무서운 호러도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만들기 어렵다. 하지만 감상 이후 잊히지 않고 기억에 남은 건 대부분 후자다.

아시자와 요의 연작단편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의 목표도 후자다. 이를 위해 작가가 동원하는 방법은 현실세계와 픽션의 세계를 섞는 것이다. 이 방식에 대해서는 <괴담의 테이프>를 다룰 때 한 번 다룬 적이 있으니 일반론에 대해서는 그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책 밖으로 흘러 나오는 공포… ‘이것’은 잉여가 아니다, 북DB, 2017. 8. 30.)

책의 화자는 작가 자신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되는 잡지, 단편들이 그 잡지에 실린 시기도 모두 사실이다. 마지막 단편은 잡지에 실리지 않고 단행본에만 따로 실렸는데, 이 역시 어느 정도는 효과를 노린 것 같다. 작가 자신이 주인공인 일인칭 소설은 이게 편리하다. 작가가 스토리를 위해 소재가 되는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작가는 2016년 ’소설 신초’라는 잡지에서 괴담 원고 청탁을 받는다. 지금까지 괴담 글은 써 본 적이 없지만 마침 직접 겪은 설명되지 않는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 그걸 글로 옮긴 게 첫 단편인 ‘얼룩’이다. 그 작품을 쓰자 주변 아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괴담들을 하나씩 들려주고 단행본 한 권 종류의 분량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단편에서 이들을 하나로 엮을 수도 있는 가설이 제시된다.

메타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호러는 처음이지만 장르 문학의 경험이 풍부한 작가가 호러 소설의 작법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고, 독자는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구경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야기는 허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현실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미스터리 작가가 자신의 장기를 최대한 활용해 쓴 호러물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구조가 비슷하다.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비극 전후에 전에는 몰랐던 사건의 진상, 또는 진상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설이 떠오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스터리 자체보다 그 미스터리를 다루는 방식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사건을 다룬 이야기에서는 셜록 홈즈 이야기에서처럼 완벽한 해결책을 기대할 수는 없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진짜로 일어난다는 걸 믿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까’라는 가설을 주고 그 가설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불완전한 단서를 제공해주면 훌륭한 호러물의 결말로 이어진다.

이 도구가 완벽할 수는 없다. 특히 따로 들은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트릭은 인위성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장르물이란 대부분 짜고 치는 게임이다. 어차피 독자도 실화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 느낌을 즐기려 모르는 척하며 책을 읽는다. 그리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은 이 합의된 상황 안에서 대체로 재미있고 종종 오싹한 호러 미스터리의 답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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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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