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4.28 조회수 | 1,131

아무리 노력해도 가족이 될 수 없어! 인간형 로봇 이야기

얼마 전 개봉된 영화 ‘서복’의 감독 이용주는 아직도 자신의 영화가 SF가 아니라고 꾸준히 말하고 다닌다. 장르의 외피일 뿐이고, 자신은 SF라는 말을 쓴 적도 없고. ‘복제인간을 소재로 설정한 건 삶과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는 도구로 그만한 게 없다는 판단에서”라고도 한다. 21세기에 이 천진난만함은 신기한 구경거리다. SF의 소재를 도구로만 썼으니 SF가 아니고, 삶과 죽음의 주제를 다루었으니 SF가 아니고. ‘서복’이 왜 총체적으로 밋밋한 영화일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단서다. 장르물을 만들면서 장르에 무지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남들이 이미 오래 전에 한 고민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다.

‘SF의 도구를 빌렸다’라는 말은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담아 다른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노벨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도 클로닝을 다룬 자신의 SF 소설 <나를 보내지 마>에 대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당시 과학에 큰 관심이 없었고, 클로닝을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장치로 이용했다.” 하지만 이는 이용주의 발언과 전혀 뉘앙스가 다르다. 이시구로는 자신의 장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당시 자신의 관심이 현실 과학보다는 보다 정통적으로 여겨지는 문학적 주제에 쏠려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지 마>는 구식 SF적 관습을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게 이용하긴 했지만, 그 가능성을 문학적으로 최대한 활용한 아름다운 책이다.

노벨상 수상 이후,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첫 번째 소설인 <클라라와 태양>도 SF이다. 오로지 클로닝 기술만 발전한 20세기 후반의 대체역사 영국을 배경으로 한 <나를 보내지 마>와는 달리 <클라라와 태양>의 배경은 강인공지능이 완성되고 유전자 공학으로 인간들이 ‘향상’될 수 있는 미래의 미국이다. <나를 보내지 마>보다는 훨씬 정통 SF에 가까운 작품이다. <나를 보내지 마>가 70년대 클로닝 소재 SF의 관습을 문학적으로 활용했다면 <클라라와 태양>은 인공지능과 유전자 편집과 같은 현실 과학, 그리고 이에 대한 고민과 비교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클라라와 태양>의 과학이 정통 SF로서 그렇게까지 설득력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예를 들어 나는 인간형 로봇이 나오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늘 그걸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 기술에 신경을 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로봇 클라라는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에너지 상당량을 태양광에서 얻는다. 이 정도 효율의 태양광 발전 기술이 있다면 로봇에 적용되기 전에 이미 사회를 엄청나게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시구로가 그리는 미래 세계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아직 내연기관 자동차가 돌아다닌다. 스토리의 중심을 이루는 클라라의 미신적인 사고 방식 역시 기능과 지능을 고려해보면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 단지 나는 이미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기 때문에 이를 이시구로식 독특한 취사선택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클라라는 인간형 로봇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들은 AF, 그러니까 artificial friend(인공 친구-편집자 주)라고 불린다. 소설 초반에 가게에 전시되어 있던 클라라는 조시라는 병약한 여자아이의 집에 팔려간다. 클라라는 조시의 친구가 된다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씩 배워간다. 책 뒷표지에는 <나를 보내지 마>와 <남아 있는 나날>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품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설정만 봐도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인과 같은 직책에 종사하는, 온전히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이 작품의 매력과 아름다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주인공 클라라다. <나를 보내지 마>의 클론 주인공 캐시 H.와 애잔한 말투는 비슷한데, 인간 기준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다. 클라라는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강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지만, 첫 페이지에서부터 독자들은 언캐니 밸리의 오싹함을 살짝 느끼면서도 이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며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신형 제품이 나와 할인 딱지가 붙은 채 자신을 입양할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지적 존재를 상상해보라. 소설의 서스펜스 대부분 역시 클라라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유주인 가족으로부터 물건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발생한다.

인간과 아주 유사하지만 인간은 아닌 클라라라는 존재는 인간의 이야기를 위해 불려온 SF 도구이다. 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계를 통해, <클라라와 태양>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관찰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유한성, 죽음의 공포, 주변 사람의 상실감, 헌신과 희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시구로가 선정한 이 주제는 적어도 이 소설 안에서는 오로지 SF의 어휘의 틀을 통해서 전달된다. 당연하지만 <클라라와 태양>은 오로지 이 장르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아름다운 SF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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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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