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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6.07.29 조회수 | 7,896

[과학살롱] 르네상스 번역가 노승영 "과학적 생각이 갈등 줄일 것"

10년 동안 50권의 번역 작업을 하려면, 1년에 5권씩, 2~3달에 한 권 이상은 꾸준히 번역을 해야 합니다. 게다가 번역물이 상당한 수준의 교양서라고 하면, 그 성실함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요. 이런 성과를 이룬 본인은 오히려 덤덤하고 소박하게 말합니다. “앞으로 10년 더해서 100권을 채우고 싶다”고. 조용히, 묵묵하게 우리의 사상적 토양을 풍요롭게 하는 일에 열정을 쏟는 번역가 노승영 인터뷰입니다.

Q 작업실이 아늑합니다. 서서 작업할 수 있는 높낮이 조절 책상, 기타와 키보드(건반), 샌드백이 눈에 띄네요.

한 가지 일만 하면 지루하기도 해서요. 가끔 연주도 하고, 몸도 풀고 그렇습니다. 높낮이 조절 책상은, 어느 도서관에 설치된 것을 보고 작업실에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장에 직접 연락해서 산 겁니다. 장시간 앉아 일하는 것보다 서서 일하는 게 훨씬 좋은 것 같아요.

Q 자유롭게 일하면서도, 자기 관리에 철저한 느낌입니다. 그럼 선생님 소개부터 부탁합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인지과학협동과정에 진학하여 언어학, 철학, 심리학, 신경과학, 컴퓨터공학을 공부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이과였는데 재수하면서 전과를 했고요, 그래서 이과적 성향과 문과적 성향이 둘 다 있는 듯합니다. 컴퓨터 프로그램 만드는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하다 한겨레문화센터 강주헌 선생님의 번역 강의를 계기로 출판 번역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 첫 책이 나왔고 지금까지 10년 동안 50종을 번역했습니다.

Q 영문학을 전공하고, 인지과학협동과정에 진학하신 점이 독특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참고서의 영한 번역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나름대로 번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고 사상과 문화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요. 학부 전공 때도 언어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인지과학 공부를 이어서 하게 됐고요. 인지과학은 번역하기 위해 공부한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다방면의 책을 번역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Q 작업실 이름이 동문재(東文齋)입니다. 어떤 뜻을 담은 건가요?

원래는 작업실에 달려 있던 예전 가게 간판 덕분에 불청객이 종종 찾아왔습니다. ‘허브다이어트’여서 여자분들이 문을 두드리더라고요. 그래서 간판을 교체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한자 현판을 달고 싶긴 한데 너무 어려우면 손님이 찾아오거나 택배를 받는 데 애로사항이 있어서 쉬운 이름을 고르다 보니 ‘동문재’로 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아이들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셈이 되었네요.

“책의 탄생에 나름대로 한몫한 특별한 독자라는 느낌 좋아”

Q ‘르네상스 번역가’라는 별명이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르네상스 번역가는 과분한 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 강의할 때 “예전의 번역가들은 르네상스적 지식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긴 합니다. 요즘이야 모르는 것은 대부분 검색으로 알아낼 수 있지만, 선배 번역가들은 영한사전 하나만 가지고 번역을 했기 때문에, 모든 지식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르네상스 번역가’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먹고살기 위해 번역을 하기에, 어떤 분야가 들어와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계형 번역가’, ‘잡식성 번역가’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방면의 번역을 하다 보니 여러 분야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서 저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Q ‘잡식성 번역가’는 새로 만든 별명인 거군요.(웃음) 10년간 번역 작업을 하셨는데요, 직업으로서의 번역가, 그 매력은 무엇인가요?

어떤 면에서 번역가는 책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꼼꼼히 읽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있으면 저자와 메일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책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죠. 마음에 드는 저자나 책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은 무척 뿌듯한 일입니다. 가끔은 자신이 저자의 대리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책이 출간되었을 때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역자 증정본을 받아서 책장을 펼치는 순간입니다. 저도 일개 독자에 불과하지만, 이 책의 탄생에 나름대로 한몫한 특별한 독자라는 느낌이 좋거든요. 저자와 메일을 주고받고 있었다면 한국어판 표지 사진을 보내주는데, 그러면 저자들이 기뻐하면서 한국어판을 꼭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저자 증정본은 에이전시에서 보냅니다) 책이 나온 뒤에 독자의 반응을 읽는 일도 즐겁습니다. 때로는 오역이나 오타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정오표에 반영하여 인터넷에 공개합니다.

Q 반면에 어려운 점이나 아쉬운 점도 있겠지요?

제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닥치는 대로 번역을 하다 보니 해당 학문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채 번역할 때가 있습니다. 학계나 그 분야에서 널리 쓰는 용어를 숙지하지 못하면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번역하는 시간보다 자료 찾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원문을 이해했더라도 한국어에 적절한 번역어나 표현이 없으면 어색한 번역투를 쓰거나 아예 용어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번역가로서의 고충은 번역료가 10년째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이건 진입 장벽이 없는 프리랜서 업종이라면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별한 준비 없이도 번역에 뛰어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번역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출판사가 좋은 번역가를 찾기 힘들고 실력 있는 번역가가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기 힘듭니다. 어쨌든 지금의 번역은 출판의 한 부분이므로 출판계가 어려워지면 그 여파를 고스란히 받는 듯합니다. 일거리가 끊기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번역 과정에서의 어려운 점은 참고 자료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동식물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서 번역자가 새로 이름을 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명은 동식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동식물의 분류에 적합하고 다른 동식물과 겹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번역자가 이런 작업을 제대로 해내긴 힘듭니다. 1차 자료나 2차 자료를 토대로 쓴 3차 자료를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1차 자료와 2차 자료가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면 한국 독자는 뿌리는 없이 열매만 따 먹는 격이 되기 때문에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 힘들어집니다. 각 학문 분야의 대표적인 저작은 전공자가 필생의 과업으로 번역해두어야 저 같은 생계형 번역가들이 다른 책을 번역할 때 참고할 수 있습니다.

Q 번역가로서, 각종 매체에 칼럼 연재도 하고 계시지요?

오마이뉴스와 북클럽 오리진, 악스트(Axt)에 글 쓰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는 ‘한국어 낯설게 보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공기처럼 쓰는 한국어이지만 번역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접하는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쓰고 있어요. 북클럽 오리진에는 주로 제 일상을 소재로, 번역하다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서 쓰고 있습니다. 악스트는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격월간으로 펴내는 문학잡지인데요, 서평을 비롯해 잡지 성격에 맞는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노승영 선생님은 현재 악스트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 기자 주).

“과학책은 소통과 논증의 모범… 과학적 생각법 익히게 돼”

Q 평소 즐기는 책이나 관심 주제는 어떤 것인가요?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요즘 저의 소일거리는 도서관 ‘신착도서’ 서가에 가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골라 빌리는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본문에 인용된 책이 흥미로우면 그 책을 구해 읽습니다. 저는 지식의 생산자가 아니어서 한 분야를 철저히 파고들 필요가 없다는 점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소한 작가나 생소한 분야와의 우연한 만남을 즐기는 편이죠.

요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입니다. 모든 저자가 이런 식으로 책을 쓸 필요는 없겠지만, 독자에게 빅히스토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지구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해 성찰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가 이권우 선생님 말처럼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 책을 쓸 수 있는 저자는 많이 있다고 봅니다. 과학 지식을 날것 그대로 던지거나 흐물흐물하게 녹여서 먹여주는 게 아니라 몇 번 씹어서 넘겨주어 독자가 스스로 씹고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Q 최근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이란 과학책을 번역하셨습니다. 담고 있는 과학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노년’이라는 주제로 묶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은 출판사에 직접 출간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사람들이 덜 소외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년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늙어서 할 일이 없고, 사회에서 인정도 받지 못해 존재가치를 잃어버리는 사회는 참 불행한 것 같아요. 책 내용은 노화와 관련한 생물학적 물음에 대한 사유와 연구, 동물들의 노년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인간 삶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가 보면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번역 작업을 꼽으라면요?

제롬 케이건, <정서란 무엇인가>입니다. 빨간색 교정지를 처음 받아본 작업이었거든요. 그 전까지는 제가 웬만큼 번역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편집자 입장에서는, 또한 독자 입장에서는 미흡한 점이 많았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쓰는 것과 독자가 읽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 어떻게 쓰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읽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Q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 책 번역을 많이 하셨습니다. 과학책 번역의 특이성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과학책은 읽고 나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책입니다. 요즘 과학책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해줍니다. 과학책 번역은 깔끔합니다. 애매한 군더더기가 없이 사실의 세계를 서술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좋음과 나쁨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다루고 있어서 명쾌합니다. 그 대신 오역을 저지르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사실관계가 엉뚱하게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요즘 과학 저술가들은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과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과학책은 반증 가능성, 공통의 언어, 지적 겸손 등을 바탕에 깔고 있기에 소통과 논증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독자가 과학책을 읽으면 단순히 과학 지식을 얻는 것을 넘어서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몸에 익히게 됩니다.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생각한다면 오해와 갈등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추천하는 과학책을 소개해주시고 향후 계획이나 꿈과 관련하여서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전중환, <오래된 연장통><본성이 답이다>를 꼽고 싶습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진화심리학의 설명이 현실을 정당화한다고 착각하는 자연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화심리학을 활용하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계획은 앞으로도 꾸준히 번역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50권을 번역했으니까 앞으로 10년 더 하면 100권을 채울 수 있겠네요. 저의 번역 작업을 통해 우리나라의 사상적 토양이 좀 더 풍요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인터파크도서 과학 MD가 꼽은 ‘노승영 번역 추천 과학도서’]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앤 이니스 대그/ 시대의창/ 2016년)


- 늙은 동물은 무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조나단 실버타운/ 서해문집/ 2016년)


- 문학, 신화, 역사를 만나 예술이 된 수명과 노화의 과학

 

<만물의 공식>(루크 도멜/ 반니/ 2014년)


- 우리의 관계, 미래, 사랑까지 수량화하는 알고리즘의 세계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데니얼 데닛/ 동아시아/ 2015년)

- 지구 최강 지식인이 건네는 77가지 상상력과 집중력 단련 도구

 

<숲에서 우주를 보다>(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에이도스/ 2014년)


- 자연의 모습을 시인의 언어로 그리다. 오래된 숲 1세제곱미터를 1년 동안 관찰, 사색한 결과물. 

글/ 사진 : 김현기(인터파크도서 과학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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