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터뷰

북&인터뷰 등록일 | 2018.01.17 조회수 | 5,211

소설가 전경린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위험하다”

기억은 우리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습격해온다. 감정과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고통스러운 주홍글씨로 남기도 하고, 축복의 시간으로 머물기도 한다. 우리는 그러한 기억을 안고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전경린 작가의 열두 번째 장편소설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문학동네/ 2017년)을 읽으면서 자주 떠올랐던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여인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여인이라는 점에서 그랬을까. 이 소설의 주인공 ‘나애’는 “어떤 일은 단 한 번 일어났다 해도 영원히 계속된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소설은 나애라는 인물의 기억과 감정, 그에 얽힌 관계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펼쳐간다.

불굴의 빛으로부터 발견한 내면의 질서

전경린 작가는 최근까지 대학 강의를 위해 고향에서 지냈다. 그녀는 고향에서 지낸 6년의 세월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전했다.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히면서 ‘불굴의 빛’이라는 말을 꺼내 들었던 그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불그레 빛’으로 잘못 듣기도 했는데 후에는 그녀가 말하는 불굴의 빛이 불그레한 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니 꽤 그럴듯한 조합이라고 생각됐다. 전경린 작가는 많은 실패와 상처 가운데에서도 늘 새롭게 소생시키는 빛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왔다. 그 빛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최초로 그 빛을 인식한 것은 언제인지에 대하여. 그러한 연유 때문인지 이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 등불을 들고 가는 설정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주인공은 유년시절의 친구에게서 상실을 경험한 뒤로 어른이 되어도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로 살아가요.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만 보더라도 어떤 약속을 지속할 수 있는 관계가 많지 않죠. 이렇게 고독해진 삶의 생태계 속에서 불안정하게 이동하며 살아가는 삶에 중점을 두고 인물을 그렸어요.

이번 책에 ‘고독의 질서’라는 소제목도 넣어 두었는데 저는 고독을 부정적인 것만으로 보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 내부에 홀로 갖는 필연적 질서가 있거든요. 자기만의 단단한 내면적 질서를 고독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현실에서 고독을 갖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한 거죠. 그러한 고독이 없으면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휩쓸리기 쉬우니까요. 그래서 저는 고독을 극복할 어려움이 아닌 내면적인 힘이라고 생각해요.” 

“내면심리를 파고드는 힘?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탓”

이 소설은 문학동네의 네이버 카페에서 2017년 3월부터 7월까지, 넉 달간 연재되었던 동명의 작품을 수정해 엮은 것이다. 등단한 이래, 줄곧 혼자 쓰는 방식에 익숙해 있던 그녀가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소설을 써나갔다고 하니 그 과정이 궁금했다. 전경린 작가는 독자의 반응을 살피며 집필하다 보니 소설을 좀 더 객관화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독자의 반응에 따라 소설의 전개 방향을 다르게 설정하기도 했다고. 이를테면 주인공과 어머니의 관계가 그러했다. 초반까지만 해도 상당히 긴장감 있게 흐르던 둘의 관계가 집필하는 과정에서 많이 누그러졌다.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어머니로부터 쫓겨나는 장면이 있어요.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딸은 시집가면 출가외인이라고 생각해서 남의 식구인 것처럼 키웠거든요. 딸을 두고 ‘치운다’는 말도 흔하게 썼고요. 저희 이전 세대의 어머니들은 가부장제를 아주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딸들에게 물려주려고 했죠. 주인공과 어머니의 갈등이 촉발된 지점도 거기에 있고요. 자신의 삶을 물려주려고 하는 어머니와 그것을 거절하려는 딸 사이에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대물림 되는 관습과 구조 안에서 기꺼이 자기 자신이 되려는 인물이에요.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하고 느끼며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죠.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전쟁과 독재 시대를 겪으며 생존이 유일한 가치였던 저희 어머니 세대에게 있어 이러한 욕망은 거의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할까요.”

불우한 가정환경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 그들로 인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 주인공의 삶.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은 주인공의 유년기와 성장 과정을 섬세한 문장과 묘사로 담아냈다. 전경린 작가에게 인물의 내면 심리를 파고드는 힘에 관해 묻자 그녀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기는 탓”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이 소설을 쓰는 목적도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고 탐구하는 것에 있다고.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감정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쓰지 않으면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해 자신의 감정을 소설로 옮기는 것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기억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감정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감정이 고이지 않은 기억은 없으니까요. 우리가 사는 시간이 기억으로 바뀌고, 감정이라는 물질로 단단한 벽돌처럼 쌓여갈 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래서 저는 감정을 담을 수 없는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어요. 불완전한 삶 속에서 오직 써야만 완전해진다고 느꼈죠. 일기를 쓴다고 해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너무나 부족했어요. ‘과연 몇 년도에 태어나서 몇 년도에 입학하고 또다시 몇 년도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식의 연대기만이 삶일까’라고 물으면서요.

진정한 삶은 감정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감정은 물에 녹은 소금처럼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붙잡고 싶었죠. 그러다 보니 소설을 통해 감정을 많이 담게 됐어요. 저는 느끼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욕망하고 기억하는 것들이 행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것으로 생각해요. 삶의 벽들을 통과하는 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소설에는 제가 느낀 것만을 써요. 이야기를 구상하고 인물을 정해놓아도 그것들을 온전히 느낄 때까지 기다리죠. 제 느낌을 통해서 문장이 나와야 하니까요.”    

기억에 대한 끈질긴 탐색을 통해 성장소설로 나아가

전경린 작가는 이번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아무래도 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계속해서 오가는 탓에 오늘날의 주인공과 유년시절의 주인공을 서로 묶고 매듭짓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그녀는 고민 끝에 뱀 여인 이야기를 수수께끼 형식으로 가져오기도 하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주인공을 그려내기 위해 새로운 인물을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처음에는 3인칭 시점으로 주인공을 그려보기도 했으나 과거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어 1인칭의 시점으로 바꾸어 서술했다고.

“소설의 끝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려는 주인공을 어떤 곳으로 보내줘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그동안 제가 그려온 인물은 대부분 파국으로 치달았던 경우가 많았거든요.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주인공 ‘미흔’이 대표적이죠. 미흔은 벼랑 끝으로 몰아서 아예 밀어버린 인물이에요. 사람들이 신세 망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요. 하지만 미흔은 가부장제를 찢고 나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꼭 그랬어야 했죠. 사실 쓰면서 쾌감도 느꼈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소설은 참 나쁜 거예요. 뭐랄까. 구성이든 문체든 그 전체로 기존의 세상을 찢고 나가야 하거든요. 나쁠수록 더욱 잘 찢어지는 거고요.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인물에 대한 연민이 생기더라고요. 주인공이 너무 힘들겠다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좋은 길을 가르쳐주고, 가능한 제일 좋은 곳에 데려다주고 싶었어요.”

전경린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왜 그토록 기억에 대해 끈질기게 탐색했던 것일까.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옛 기억이 너무나 생생한 현실로 다가올 때가 있다고 했다. 먼 곳을 바라보며 넓은 세계를 향해 나가던 젊은 시절과 달리, 과거의 기억이 불쑥 실제의 구체적인 물질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고. 무게를 가진 날카로운 조각이 된 기억. 그것으로부터 상처받던 시기를 겪은 뒤로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성장의 시기를 재구성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고자 했다.

“시간을 쌓아온 사람이라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누구에게나 자신을 위한 성장소설이 필요한 것 같아요. 타자로서 겪은 세계를 주체로서 다시 한번 재구성해주는 것이 필요하죠. 그 기억을 회고하면서 모든 걸 정리해야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거든요.

사실 이 책을 내고 나서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책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염소를 모는 여자>였는데 그 뒤에 보면 황현산 선생님의 글이 있거든요. 그분이 써주신 해설을 보면 마지막에 ‘이 작가는 새로운 성장 소설을 써야 할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제게 있어 아주 늦은 성장소설로 의미가 클 것 같아요. 이 소설을 끝냈을 때 저를 옭아맸던 모든 관념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어요. 굉장히 홀가분했죠. 일종의 해방감이랄까요. 뭔가 해냈다, 완성했다,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죠. 이 소설은 제가 앞으로 뛰어나가게 만드는 자유로움을 준 것 같아요.”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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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정(북DB 객원기자)

언제나 자유롭고 언제나 사랑하며 언제나 배우고 언제나 글을 쓰고 언제나 즐기며 계속해서 뿌리가 깊어지고 품이 넓어지는 나무처럼 살고 싶습니다. egloo@daum.net

작가소개

전경린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사막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천사는 여기 머문다], [염소를 모는 여자], [바닷가 마지막 집], [물의 정거장],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열정의 습관],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황진이], [엄마의 집], [풀밭 위의 식사], [최소한의 사랑], 어른을 위한 동화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붉은 리본], [나비]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문학동네소설상, 21세기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한국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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