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터뷰

북&인터뷰 등록일 | 2015.10.30 조회수 | 9,146

사회학자 노명우가 들려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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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올해로 아흔을 맞는다.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탈근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이자, 유럽사상을 대표하는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의 참상부터 트위터의 시대까지 살아온 역사적 경험의 증언자라 할 수 있다. 폴란드 출신의 이 사회학자는 1968년 공산당의 반(反) 유대 캠페인에 의해 교수직을 잃고 조국을 떠나게 되지만, 1971년부터 리즈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며 ‘현대성’에 관한 수많은 저작들로 눈부신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바우만의 저작이 국내에도 다수 소개되었지만, 특히 <사회학의 쓸모>라는 이 대담집은 가장 최근 바우만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2012년 1월과 2013년 3월 사이 두 학자, 미켈 H. 야콥슨/키스 테스터와 나눈 대화들로 만들어졌다). 특히 이 대담집은 사회학자 노명우의 번역을 통해, 유연하고도 날카로운 바우만의 사고를 편안한 구어체로 전해주는 동시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질문과 고민들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사회학은 무엇이고 왜 우리는 사회학을 하는가 하는 사회학자들의 고민과 전망이기도 하지만, 희망, 불안, 시스템, 유명인, 원나잇스탠드까지 사회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보았을 문제들을 다룬다. 바우만이 이야기하는 사회학은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유이자 대화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를 질문하고 있는 사회학자 노명우를 만났다. 



사회학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찾기



Q 첫 질문으로 드리기 조금 난감하긴 하지만, “사회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회학이 정치학, 경제학, 인류학, 또 인문학과는 무엇이 다를까요. 책 제목부터가 ‘사회학의 쓸모’라고 나오니 이런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 물음은 학자로서 쉽게 답하기 가장 어려운 질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도 그렇지만요, 다른 학문과 비교해 ‘사회학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더 대답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단순히 이야기하자면, “사회학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다소 궁색한 답은 뭔가 명쾌하지 않고 공허하게 들립니다. 사회학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을 하는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연구의 대상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연구자는 이 변화를 지속적으로 쫓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회학이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가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 제 생각에 사회학은 “나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학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아마 이 질문은 누구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일 것 같아요.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 질문이야말로 자신을 성숙시키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질문을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게 뭘까?”라는 질문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자신을 아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어떤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나”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가 동시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 내가 어떤 시대적·사회적 환경에서 살고 있는가에 따라 ‘나’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는 내면의 속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외부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학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학문이라고 봅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회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조나 피상적인 개념들을 다룬다고 생각하는데, 사회학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 꿈,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 좌절을 발생시킨 사회에 관한 질문이지요. 



Q 이 책에서 바우만은 사회학의 창시자로 마르크스와 짐멜, 그리고 막스 베버를 꼽고 있는데요(77쪽). 선생님의 답변은 마르크스가 “인간은 유적 존재”라고 말한 규정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근대적인 질문이라고 말하지요. 그 이전 사람들의 가치관과 삶이 종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가 근대에 들어서야 내가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이 질문은 처음엔 철학적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이 질문이 사회과학적 질문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현실적으로는 시민혁명이 태동하게 되면서이지요. 왕정이라는 과거의 질서를 붕괴시키고 처음으로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시기지요. 마르크스의 인식도 그러한 전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고, 당대로서는 아주 독특한 것이었어요.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라는 것도 개성으로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무리,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 그리고 이 계급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서 인간의 존재성격이 규정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적 인식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인식이 지금 우리에게는 상식처럼 느껴지지만, 그 당시에는 획기적이고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선생님은 역자후기에서 사회학이 분과학문으로 자리를 잡아오면서 정교함 대신 잃어버렸던 패기, 용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쓰셨는데,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사회학의 위기라든지, 사회학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맥락을 좀 설명해주시겠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사회학은 근대가 낳은 학문이에요. 고대부터 있어왔던 정치학, 물리학과 같은 학문과 달리 사회학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장 근대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 사람들은 신분제, 봉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인간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지요. 어떻게 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가, 어떤 사회질서가 구축되어야 하는가 하는 상상이 필요했던 거지요. 이렇게 사회학이 탄생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초창기 사회학자들은 어느 정도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사회학은 나이브한 학문이기도 하고, 낭만적인 학문이기도 했지요. 꿈을 꾸는 학문이니까요. 상상력이 중요한 것이지 방법적 정교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증명의 문제, 필연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차원이니까요. 

사회학이 아카데미 안에 제도화된 분과로 설립된 건 훨씬 더 이후예요. 사회학과가 대학에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서부터였지요. 원래 사회학은 상상적 에너지와 관련된 학문이었는데, 새로운 분과로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검정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즉 이 학문이 왜 아카데미에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여기서 사회학이 채택하는 길이 실증주의적 방법이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는 사회통계방법이지요. 정치학 같은 경우 정치철학의 전통이 강하지만, 사회학은 자연과학과 더 유사한 방식, 정교함의 방법을 끌고 오지요. 사회학이 태동한 시기는 인구센서스가 시작된 시기, IBM의 실용화가 확대되던 시기였어요. 이는 엄두도 못 냈던 엄청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나 대형 전자계산기가 사용 가능해진 것이고, 그러한 장치와 방법론을 사용하는 사회학은 가장 미래지향적인 학문, 하이테크놀로지 학문으로 비쳐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학이 잃어버린 패기, 용기’란 이런 시초의 상상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요.





사회학의 소명을 묻다



Q 책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지요. 이번 바우만 대담집의 제목이 ‘사회학의 쓸모(What Use is Sociology)’인데요. 언뜻 보기에, 이 ‘쓸모(Use)’라는 말은 ‘시장가치의 유용성’을 상기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책의 내용을 보면 사회학 본연의 과제를 묻고 있는데요, 바우만은 왜 제목을 ‘쓸모’라고 붙였을까요?

이건 제 추론인데, ‘쓸모’는 한 편으로는 패러디이고, 한 편으로는 시장주의적 요구에 대한 정면대응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시대, 시장 지배의 조건에서 모든 학문에게 시장이 요구하는 게 ‘쓸모’잖아요. “너희의 쓸모를 증명해봐.” 이게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환경이지요. 이 ‘쓸모’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우만이 ‘쓸모’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 폭력적인 시장의 요구에 대한 문제제기를 깔고 있다고 봅니다. 또 한편, 이러한 시장주의적 요구에 전통적으로 인문학이 대처했던 방식은 ‘무용성을 통해 유용성을 주장한다’는 전략이었지요. 그렇지만, 바우만은 ‘우리의 무용성이 우리의 쓸모다’라는 주장을 통해 사회학이 사회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도 적당한 방법은 아니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대신, 바우만은 그러한 요구 내지 질문을 피해가지 않는, 일종의 정면대결을 택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너희들이 모르는 진정한 사회학의 쓸모를, 시장적 가치로, 환금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본연의 가치를 보여주겠다”는 의미 같아요. 그래서 ‘쓸모’라는 말이 지니는 본연의 의미를 되찾아주는 것이지요.



Q 선생님께서 내신 책,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회 현실의 이모저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사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고민과 바우만의 사유는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바우만의 대담집을 번역하시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으신지요?



이 책의 내용이 사회학의 소명을 말하고 있는데, 저도 저한테 늘 던졌던 질문 중 하나가 사회학자로서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거였어요. 지금까지는 학위를 따기 위해서나, 제도권 안에서 자리를 잡기위해 혹은 밀려나지 않기 위해 공부하고 글을 썼다면, 이제 인생의 전환점에서 사회학자로서 소명과 맞닿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길을 찾고 있는 차였어요. 그렇지 않아도 바우만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회학자이자 롤모델이었지요. 제가 바우만을 볼 때 가장 놀라는 점 중 하나는 나이가 들어감에도 전혀 녹슬지 않은 동시대에 대한 놀라운 감각, 그리고 거기에 지혜가 결합해 나타나는 촌철살인과 같은 발언들이었어요. 아, 바우만처럼 늙고 싶다. 나이 먹어서도 끊임없이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그것도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이 아니라, 동시대에 대한 감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경험과 지혜가 얽힌 글을 말이지요. 그래서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바로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에서는 바우만과 두 명의 교수가 대담을 나누는 거지만, 제가 이 책을 읽을 때는 저도 초대받은 방청객의 입장에서 듣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번역하는 순간순간 괴롭기도 했지만 세 사람의 대화 분위기 때문에 즐겁고, 얻는 바도 많았지요. 내가 갑갑했던 지점들에 대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십년 정도 제 삶을 끌고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은 듯 했어요



Q 책이 대화형식이다보니 어떤 특정 정보를 새롭게 얻는다기보다 공감되는 질문이나 답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제가 바우만에게 진짜 배우고 싶은 것은 어떤 특정 테제가 아니라, 그가 사고하는 방식이었어요. 책을 보면 두 교수가 질문을 던지고 바우만이 답하는데, 질문을 먼저 읽게 되잖아요. 그럼 제가 ‘바우만이라면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보지요. 이때 제가 예상한 것과 바우만의 답변이 맞아 떨어지면 무척 기뻤지요. 내가 바우만의 사유 방식을 배워가고 있구나 하는 희열이랄까요. 특히 마지막 질문 “사회학자도 텔레비전을 봐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바우만은 ‘봐야한다’라고 대답하잖아요. 자신의 미학적 선호나 오락 취향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인간 경험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TV를 보지 않으면 동시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고민을 하는지 사회학자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제가 썼던 책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도 그런 맥락이었거든요. 사회학자에게 TV는 가치 판단해야 하는 미디어가 아니라 세상을 내다보는 틀이지요. 이렇게 제 생각이 바우만과 유사하다는 걸 발견할 때 너무 신이 났고 전율을 느끼기도 했지요.





사회학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


Q 바우만은 인간이 처한 고통과 그 구조에 대한 관심이 큰 사회학자, 인간에게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학자라고 여겨집니다. 고통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회학은 너무 낭만적인 것 아닌가, 사회학은 꼭 윤리적인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바우만은 사회학이 과학적이 아니라,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우만이 이야기하는 윤리성은 도덕성이라는 개념과는 다릅니다. 바우만이 말하는 윤리란 상호의존성에 대한 의식이지요. 그리고 그 의식에서 오는 상호책임감입니다. 바우만을 처음으로 유명하게 만들어주고, 아도르노 상을 받게 해준 책 <홀로코스트와 근대성>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이 바로 이 상호의존성이라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서로 얽혀있다는 것, 이점은 우리에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운명을 사람들이 직시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가 명확해집니다. 홀로코스트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 윤리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었지요. 바우만은 여전히 홀로코스트의 현재성을 질문합니다. 오늘날의 홀로코스트는 나치 시대와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얼마든지 얼굴을 달리하고 우리 곁에 나타나고 있지요. 나와 상관없는 것 같은 사건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현상들에서 우리가 상호얽혀있음을 포착해낼 수 있는 성찰 능력이 바로 윤리성입니다. 그렇기에 윤리성의 문제는 사회학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지요.



Q 바우만은 사회학의 주제가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의 상호작용(혹은 대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구체적인 사회학의 주제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일단 체험은 생생하죠. 연애하다가 실연을 당하는 것, 그건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요. 그러나 체험은 자신의 좁은 폭에 갇힐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지요. 대표적으로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런 거요. 그 사람의 체험은 분명 있었던 일이지만, 그것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있는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지요. 철학적 용어로 ‘주관적 오류’라는 것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체험에도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동일한 구조 속에 살고 있고 서로 얽혀 있는 한,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체험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측면이 ‘경험’이지요. 경험은 체험이 가지고 있는 오류를 교정해줄 수 있는 동시에 나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게 하지요. 경험도 위험성이 있어요. 이게 추상적인 법칙이나 신체성을 상실한 객관적 추이로 굳어져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바우만은 경험과 체험을 끊임없이 충돌시키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체험이 가지고 있는 생생함을 남기되, 그 위험성은 경험으로 상쇄시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가 주관적 오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고통을 무시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나아가 그 공통의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Q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라는 말을 써서 하나의 지배적 원리가 통용되지 않는 오늘날의 불확실성과 불안을 이야기했는데요. 고용에서나 안전에서나 이러한 불확실성과 불안을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학의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사회학이 사람들에게 이런 공포와 불안을 직면하게 하면서 동시에 희망을 줄 수 있을까요? 이 책에서 “사회학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바우만은 예스라고 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측면에서는 사회학은 냉혹해요. 사람들을 현실의 냇가로 끌고 가야하지요. 제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한데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한편으로는 ‘새빨간 거짓말’이, 다른 한편으로는 ‘백색 거짓말’이 만연합니다. 새빨간 거짓말은 사실을 날조한 거짓말이고, 백색 거짓말은 ‘잘 되라고’, 희망을 주려고 하는 거짓말이지요. “열심히 하면 된다” “괜찮아 희망을 가져”같은 게 ‘백색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린 이런 두 거짓말에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있고, 그러한 거짓말의 협공으로 현실을 바로 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불행해집니다. 어찌 보면, 행복이라는 건 단적으로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잖아요. 무엇에 도달하는 것도 행복이지만, 현실적인 행복은 다시 말해, 출발점이 되는 행복은 ‘내가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내가 속아서는 안 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새빨간 거짓말과 백색 거짓말을 간파할 줄 알아야 하는 거죠. 사람들은 현실이 너무 힘드니까 그냥 백색 거짓말로 도피하고 거기서 위안을 얻으려고 하지요. 저는 사회학이 그런 거짓말들을 걷어내야 한다고 봐요. 이 책에서 바우만이 쿤데라를 언급하면서 “커튼을 찢는다”라고 말하는 것(39쪽). 바로 그렇게 거짓말의 휘장을 걷어내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지요. 행복해지려면 현실을 봐야합니다. 그런데 이러자면 두렵고 용기가 필요하지요. 또 혼자 현실을 직시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이 사람들에게 건네는 방법은 ‘대화’이며, 이는 “손을 잡고 같이 보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될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저는 사람들이 행복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요. 행복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행복에 대한 꿈을 허황되게 꾸지 말고 현실적으로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찾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바우만의 책이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는 독자들에게 던져줄 수 있는 메시지도 그런 거 같아요. “행복을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누구나 다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행복은 자연권이다.”





사진 : 남경호(studio 2M)



이진실(북DB 객원기자)

에디터, 자유기고가, 웹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하다가 현재는 미학과 예술이론을 공부하고 있는 늦깎이 학생. 지식을 통한 윤리적 실천을 꿈꾸고 비판적 글쓰기와 일상이 괴리되지 않는 삶을 터무니없는 목표로 삼고 있는 이상주의자입니다. thankumom@gmail.com

작가소개

노명우

1966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파주에 주둔한 미군을 상대로 ‘레인보우 클럽’을 운영했던 아버지, 그 옆에 미장원을 열어 양공주들의 머리를 말았던 어머니 덕분에 달러 경제의 혜택 속에서 자랐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은 미군 부대가 철수하고, 그 자리에 한국군이 들어와 레인보우 클럽은 무지개홀로, 미장원은 무지개 다방으로 모습을 바꾼 뒤였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다방에 앉아 마담과 레지, 군인과 면회객들이 빚어내는 세상 물정의 풍경을 구경하며 자랐다. 그에게 성장이란 학교에서 배우는 조국의 밝은 미래와 다방 손님들의 울분과 한탄 사이에 놓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것이었다. 기지촌의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풍요 속에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박사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꿈에 닿기 위해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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