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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터뷰

북&인터뷰 등록일 | 2015.05.26 조회수 | 22,029

정지돈 ‘한마디로 괴물 같은 신인’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2015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정지돈은 데뷔 3년차 신인이다. “활달한 지성과 진지한 위트로 독보적인 매력을 뽐내며 경험이 불가능해 보이는 세계에서 파괴적인 경험의 계기를, 일종의 멜랑콜리적 향수를 통해 열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에 <눈 먼 부엉이>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올해 6회를 맞은 젊은작가상은 문학동네가 등단 10년 이내 작가들의 중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국 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신인을 뽑아 격려하는 상이다. 올해 대상작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이자 근대건축가인 ‘이구’라는 실존 인물의 일화를 모아 전하는 형식으로 역사와 허구의 협간에서 현란한 곡예를 펼치며 지적 소설의 모범적인 전형을 보여준다.” “건축사에 관한 깊고도 넓은 박물지적 식견과 유머러스한 문장, 활력이 넘치는 스토리텔링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근대사를 의미 있게 조망해낸 이 소설에서 독자들은 탈장르적 서사예술의 묘미를 새뜻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지돈 작가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다. 솔직히 말하면 정지돈이라는 작가도, 그가 속해 있다는 후장사실주의란 용어도 이번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았다.(후장사실주의에 대해서는 인터뷰 본문에서 작가가 상세히 설명했다) 아마도 그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그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적인 느낌 때문에 서면으로 진행된 것을 다행이라 여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작품은 충분히 신선하고 매력적이기에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정도의 수정만을 거쳐 인터뷰 전문을 게재한다. 이 인터뷰를 통해 정지돈이라는 젊은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이 더욱 커지리라 확신한다.






Q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뜻밖의 수상이었습니다. 

Q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했습니다. 대부분 몇 번의 실패를 하는 등 등단하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은데요. 정지돈 작가의 등단 과정은 어땠나요?

저 역시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한동안 소설을 쓰지 않기도 했고 직장을 구해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만 본격적으로 써보자 생각할 즈음 운 좋게 등단했습니다. 모든 건 운입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Q 등단 후 지금까지 다섯 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이번에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는 등 무서운 신예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왕성한 활동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서운 신예로 주목받은 것 같진 않습니다. 젊은작가상 대상을 덜컥 받고 나니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그 전에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Q 아주 간략한 작가 약력에 ‘후장사실주의자’라는 말이 있어요. 좀 낯선 용어인데, 설명 좀 해주세요.

후장사실주의의 기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두 가지 설 모두 기원을 초현실주의에 두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남미 작가들의 그룹인 인프라레알리스모(밑바닥사실주의 쯤으로 번역됩니다)의 일원인 로베르토 볼라뇨가 자신의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인프라레알리스모를 패러디한 내장사실주의 그룹에 대해 썼고 이를 다시 동아시아의 작가들이 패러디해 후장사실주의로 만들었다는 버전이고요. 두 번째는 초현실주의에 반감을 품은 기 로시(역시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되긴 하지만)가 결성한 농레알리즘(비현실주의 쯤으로 번역됩니다)이 거트루드 스타인로널드 로드리고를 통해 미국으로 전해졌고 이를 그레고리 코소게리 스나이더 등의 작가들이 패러디해 비트세대의 유산으로 활용했고 이를 다시 동아시아의 작가들이 후장사실주의로 패러디했다는 버전입니다.

후장사실주의에는 강령이 없고 제한도 없고 계획도 없습니다. 사람만 있는데 이들 역시 몇 명인지, 정확히 후장사실주의자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자신이 후장사실주의자야, 라고 했던 사람도 다음날이면 아니야, 그건 아닌 거 같아, 이름이 너무 이상하잖아, 이렇게 됐다가 다음날 다시 그래도 할까, 괜찮은데 이렇게 되기 일쑤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후장사실주의자고 원하지 않으면 언제나 아닙니다. 내용은 없지만 정의는 있습니다. 정의는 있지만 정의할 순 없습니다. 정의할 순 없지만 부를 순 있습니다. 말장난 같지만 이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하게 된다면 더 하게 되겠죠. 그런데 다른 후장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Q 심사를 맡은 정영문 작가는 후장사실주의에 대해 “한국의 정형화된 소설에 싫증을 느낀 몇몇 젊은 소설가들이 스스로를 약간 조롱하듯 일컫는 말로 여겨진다”고 말했던데요. 구체적으로 한국 소설의 어떤 점에 싫증을 느끼신 건가요?

정영문 작가의 넘겨짚기고요, 딱히 한국 소설에 싫증을 느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싫증을 느끼는 건 전통적인 소설,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 성장소설, 심각하기만 한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 잠언 풍의 소설 등입니다. 

Q “작가들은 어떤 주의를 붙이는 걸 대부분 꺼리는 걸로 아는데, 정지돈 작가는 후장사실주의자라는 명패를 직접 만들어 걸고 있다”고 신경숙 씨가 말했듯이, 정지돈 작가는 작품 외에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후장사실주의자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제 자신보다 후장사실주의자라는 사실이 더 낫게 느껴지기 때문 아닐까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붙여볼까, 붙여도 되겠다, 붙였는데 떼려니 또 그렇네, 굳이 뗄 필요있나, 이런 생각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Q 기존의 텍스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때문에 정지돈 작가의 소설을 ‘지식조합형’ 소설이라고 규정하던데요. 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어떤가요?

지식조합형이라는 말의 의도는 알겠지만, 너무 단순화된 정의라는 생각은 듭니다. 서사에 치중하는 소설들에게 서사강박형 소설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의식의 흐름을 주된 기법으로 쓴다고 의식흐름형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텍스트나 역사적 사실을 활용하는 방식은 다른 방식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여러 작가가 활용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중요한 건 이런 방식을 각각의 작가가 어떻게 쓰고 있냐 하는 것이겠죠. 보르헤스에게 지식조합형이라고 하거나 헤밍웨이카버에게 단문나열형 작가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욕을 먹을 것 같네요. 


Q <눈먼 부엉이> <미래의 책> <창백한 말> 등은 제목까지도 기존의 텍스트들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기존의 텍스트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저는 읽는 것은 곧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찬가지로 쓰는 것은 읽는 것입니다). 글을 쓰며 내가 읽은 것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목은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정해진 듯합니다. 

Q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사실들을 허구와 잘 조합해 지적 소설의 모범적인 전형을 보여준다”는 평도 있지만 “지식을 조합해 ‘소설’을 만들기보다는 지식조합형 소설이라는 형식 완성의 즐거움을 얻는 데 그쳤다”는 비판도 있더라고요.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지식을 조합하지 않고 그냥 나열만 해도 소설이라고 하면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이라는 구분을 하려는 분들은 어떤 생각에서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소설이라는 훌륭한 공주가 있고 그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무찔러야 하기 때문일까요.

뒤샹의 ‘자전거 바퀴’를 처음에는 누구도 미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뒤샹은 ‘자전거 바퀴’를 그냥 좋아서, 아름다워서, 즐거움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을 나열하고 조합하고 변형하는 게 좋고 즐겁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소설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고다르는 ‘미치광이 피에로’를 만들고 트뤼포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내가 만든 것이 영화인지 샌드위치인지 모르겠어.”




Q ‘작가노트’에 보면 “많은 작품의 도움을 받았다. 소설도 있고 산문도 있고 시도 있고 기사도 있으며 영화도 있고 노래 가사도 있다”면서 그 목록을 적었는데, 무려 두 페이지가 꽉 차더라고요. 짧은 단편에 너무 많은 등장인물과 텍스트가 인용돼 소설이 어렵고 산만하게 느껴졌어요. 꼭 필요한 장치였나요? 

소설이 어렵고 산만하게 느껴지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정보와 전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코프는 정말로 진지한 작품에서는 갈등이 등장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고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진지한 작품은 독자의 관습화된 독법에 제동을 걸기 때문입니다. 고다르가 하려고 했던 일 역시 영화를 보는 법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작품이 있고 여러 종류의 독법이 있습니다. 독자에게 직접적인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플롯을 만들고 인물과 갈등, 사건을 배치하고 운용하는 작품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작품은 다른 시각과 다른 방식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쓸 때 필요와 이유를 따지며 쓴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와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인용의 문제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어디가 인용이고 인용이 아닌가요. 왜 인용이나 패러디는 어렵게 느껴집니까. 인용과 패러디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소설의 세계가 더 확장되고 즐겁지 않을까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을 보며 그런 즐거움을 느낍니다. 

Q ‘건축에 대한 박물지적인 지식’이라는 표현도 있을 만큼 건축에 대한 지식이 방대합니다. 평소 건축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이 소설을 쓰게 된 건지, 아니면 이 소설을 쓰기 위해 건축에 대한 공부를 한 건지 궁금합니다. 

20대에 같이 자취하던 친구가 건축과에 다녔습니다. 그 친구의 건축과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내며 건축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이후에도 꾸준히 관심이 있는 편이었고, 소설을 쓰기 위해 공부도 했습니다.

Q 때로는 소설을 읽고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작가노트’ 같은 걸 통해 해결하기도 하는데요.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반가운 마음에 ‘작가노트’를 펼쳤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웃음)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영원의 건축>을 읽고 영감을 얻어 이 책을 쓰게 된 것인가, 자신의 소설을 이해시키기 위해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과정을 쓰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고다르를 인용해 말하는 것 같다는 점 외에는요. 그런데 동료 작가인 이상우, 오현기 씨의 글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무슨 힌트가 되나요?

이상우오한기의 글은 소설을 이해하는 데 힌트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작가노트를 쓸 때 그들의 문장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글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쓸 때 많은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설은 퀴즈나 수수께끼가 아니기 때문에 소설 뒤에 소설에 대한 해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궁금증이나 의문을 해소하거나 해소시켜주는 작가가 있다면 저는 화가 날 것 같습니다. 작가의 말은 소설을 보는 재미나 의문을 더 키워주는, 더 복합적인 사고를 하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처음 이 소설을 읽고 건축과 혁명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번을 더 읽었는데요, 한국인도 일본인도 될 수 없이 평생을 무국적자로 떠돌았던 이구라는 인물과 동시대를 살았던 건축가들, 그리고 이들의 삶을 주목했던 이들(예를 들면 고다르 같은)의 삶의 과정이 결국은 혁명이 아니겠는가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르 꼬르뷔지에가 한 말입니다. 건축사에서는 꽤 유명한 질문 중 하나인데요, 르 꼬르뷔지에는 그에 대해 건축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정확히는 혁명은 피할 수 있다, 라고 했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혁명이다, 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질문을 했다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왜 르 꼬르뷔지에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질문을 했을까, 그리고 이구는 왜 건축을 했을까.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그런 질문을 하고 답을 하며 움직이는 이들과 질문과 답을 하는 이들에 의해 움직이게 된 이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 사이의 대화입니다. 

Q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식으로 한국 문단에 충격을 안겨줬다는 것만은 분명한데, 사실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떤 서평에서 “당신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원인을 텍스트의 어두컴컴함 속에서 찾지 말고, 당신 안에서, 즉 당신 가슴의 어두컴컴함 속에서 찾으시오. 메시지 안에 포함된 내용보다, 이것이 우선한다.”는 글을 쓰셨던데, 혹시 이 말이 정지돈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대답인가요? 

음. 그건 장 뤽 낭시의 이야기네요. 익숙하지 않다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제 작품이 이해 못할 만큼 어려운 작품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는 글이 어렵다거나 작품이 이해 안 되면 시간을 두고 여러 번 다시 읽습니다. 꼭 전체를 정독하진 않고 부분적으로 읽기도 하면서요. 그러면 좋더라고요. 

Q 정지돈 작가 소설의 매력은 ‘유머’도 빠질 수가 없는데요. 평소 유머에 대한 생각과 작품 속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 궁금합니다.

볼라뇨는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명석함과 착한 마음씨, 유머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작년 일기에 이렇게 썼네요. 유머와 슬픔은 한 묶음이다. 슬픔이 없는 유머는 유머가 아니고 유머가 없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다. 윤리는 유머와 슬픔 속에 있다. 

Q 좋은 소설이란 어떤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글쓰기를 추구하시는지요? 

좋은 소설은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추구하는 글쓰기는 없습니다. 글 쓸 때마다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Q 소설을 쓰는 데 정지돈 작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는 누구인가요?

10대에는 용대운대쉴 해밋, 20대에는 존 파울즈, 모리스 블랑쇼, 30대에는 플로베르, 볼라뇨, 제발트입니다. 

Q 한국 작가 중에는 누구를 좋아하는지요?

배수아, 백민석, 정영문입니다. 

Q 하나의 단편을 쓰는 데도 이렇게 많은 자료를 사용하는 걸 보면 평소 책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클래식 음반 세계의 끝> <화산 아래서> <나의 사적인 도시> <영원한 남편> <송곳> <회상> 등을 읽고 있습니다. 

Q 예전 인터뷰를 보니 야간경비원을 했다가 수입이 안 돼 그만뒀으나 기회가 되면 또 하고 싶다고 하셨던데, 많은 직업 중에 야간경비원을 하고 싶은 이유는요? 

블라디미르 니키포르프라는 러시아 출신 작가가 쓴 <어느 야간경비원의 일기>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망명한 지식인, 작가들이 외국에서 생계를 위해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인데요, 러시아뿐 아니라 남미나 동구권 출신 작가들도 경비원으로 일한 경우가 많습니다.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경비원은 자본주의가 낳은 최고의 선물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아무튼 경비가, 특히 밤마다 텅 빈 빌딩 속을 손전등을 들고 헤매는 야간경비가 매력적으로 보여 하게 됐습니다. 또 하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노동 환경이 너무 열악해요! 

Q 근황을 들려주세요. 

옷을 사고 자책 중입니다. 

Q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되는데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요?

모르는 것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Q <건축이냐 혁명이냐>와 관련된 이야기도 좋고 아니어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격투선수 도널도 서로니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을 다 써버렸다. 파산 상태다. 나한테는 저축이라는 개념이 없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냥 산다. 내가 유일하게 만회할 수 있는 일은 싸우는 것이다.”



이미회(북DB 객원기자)

어린 시절, 외롭고 힘들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책이더군요. 가족들이 각자의 자리로 떠난 후 동네 카페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을 때, 그리고 그 책의 느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던 행복과 위안을 느낍니다. 내 안을 가득 채웠던 그 느낌을 함께 나누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mimibab@naver.com

작가소개

정지돈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고,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가 있다. 2015년 젊은작가상,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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