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7.07 조회수 | 2,990

너무 강렬해 살아남은 불멸의 외계인 이미지

여러분이 지구를 침략하는 사악한 외계인 이야기가 지겨워졌다면, 그 책임은 허버트 조지 웰즈에게 돌려야 한다. 외계인 침략물의 공식을 확립한 것이 허버트 조지 웰즈의 <우주전쟁>이기 때문이다. 물론 장르 최초라고 선언할 때는 보다 섬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조국이 외부의 적에게 침략 당하는 설정을 다룬 침략물 장르는 웰즈 이전에도 있었다. 웰즈 이전에도 외계인 침략물을 다룬 영어 소설이 하나 있었는데, 로버트 포터라는 작가가 1892년에 발표한 < The Germ Growers(세균 배양자들-편집자 주) >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이 장르의 실질적인 시조가 <우주전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화성에서 발사된 우주선들이 하나씩 영국에 떨어진다. 우주선에서 기어나온 화성인은 열선총으로 지구인들을 불태우고 다리가 세 개인 전투 기계에 올라타 영국을 폐허로 만든다. (내가 최근에 읽은 황금가지 번역본엔 ‘로봇’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많이 신경 쓰인다. 웰즈가 이 소설을 썼던 당시엔 로봇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이들은 몇 주만에 병으로 죽어버렸는데, 무균 상태의 화성에 살다 보니 지구의 미생물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7년에 연재된 작품이니 당연히 낡았다. 화성인은 오래 전에 낡은 개념이 되었다. 이들의 우주선과 로봇도 고풍스럽다. 화성인이 지구 미생물 때문에 죽는다는 해결책은 허망함을 넘어 기괴하다. 웰즈도 생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작가의 눈앞에서 SF 장르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으니까. 현대 독자들도 이 작품이 낡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의 매력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19세기 천재 작가가 최초로 상상한 외계인 침략의 압도적인 이미지는 너무나도 강렬해서 낡은 채로 살아남았다. 과학이 낡고 아이디어가 낡아도 여전히 <우주전쟁>은 강렬한 책이다. 고전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시대의 한계를 안고 불멸하는 것이다.

많은 훌륭한 SF가 그렇듯, <우주전쟁>도 사회적 풍자이고 비판이었다. 웰즈에게 이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야유였다. 이 소설에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인 영국은 우월한 외계인에게 짓밟히고 잡아먹힌다. <우주전쟁>의 비전이 이후의 외계인 침략물보다 생생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과거의 실제 역사와 함께 읽히기 때문이다. 아무리 SF라고 해도 시대와 분리되어 읽히는 경우는 없다. 모든 작품은 작가가 살던 시대의 산물이다. 당연히 후대 장르는 이 공식에서 탈피해 보다 다양한 외계인과 이들과 지구인과의 관계를 상상해야 했다. 아무리 걸작이 장르의 문을 열었다고 해도 그 걸작만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가 ‘인디펜던스 데이’를 찍는 걸 막는 사람은 없었다. 웰즈의 화성인이 지구의 미생물 때문에 죽는 것처럼 이 영화의 외계인 군단은 지구의 컴퓨터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패배한다.

수없이 각색되는 작품이다. 가장 유명한 건 오슨 웰즈(허버트 조지 웰즈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고 이름 철자도 조금 다르다)가 각색한 1938년작 라디오극이다. 중간중간에 실제 화성인 침입이 일어났다는 가짜 뉴스를 삽입해서 중간부터 듣던 청취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유튜브에도 있으니 당시 역사적 순간을 직접 체험해보시기 바란다.

영화는 1953년 바이론 해스킨이 감독한 ‘우주전쟁’과 2005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우주전쟁’이 유명하다. 두 작품 모두 현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대 미국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그 때문에 원작의 시대착오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나긴 한다. 단지 스필버그는 화성인이라는 설정은 없앴다. 그것까지 지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1953년 버전은 1988년에 텔레비전 시리즈 속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얼마 전엔 BBC에서 에드워드조 배경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폭스와 카날 플뤼스에서는 현대 유럽 배경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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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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