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6.30 조회수 | 2,528

막장 설정? 추리소설 작가의 팔레트를 통해 묘사하기

노리즈키 린타로의 1991년작 추리소설 <1의 비극>의 개정판이 나왔다. 커버에 TvN에서 드라마를 제작 중이라는 홍보 문구가 적혀 있어서 확인해 보니 ‘더로드: 1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지금 촬영중이고 하반기에 방영예정이라고 한다. 주연배우는 지진희, 윤세아, 김혜은, 천호진, 안내상.

약간 당황스럽다. 일단 <1의 비극>은 작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정통 추리소설이다. 밀실 트릭, 알리바이 트릭, 다잉 메시지와 같은 추상적인 퍼즐 미스터리의 재료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마지막에 명탐정이 강의를 통해 배배 꼬인 사건의 진상을 설명한다. 일본 텔레비전에서는 흔한 이야기인데, 한국에서는 어렵다. 한국 드라마를 채우기엔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고. 하지만 ‘대한민국 상위 1퍼센트만이 거주하는 로얄 더 힐의 추악한 욕망과 비밀 그리고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드라마’라는 설명을 보면 명탐정의 추리 같은 건 축소되고 소설을 이루는 막장 드라마의 재료들로 ‘스카이 캐슬’이나 ‘펜트하우스’와 같은 분위기의 드라마를 만들 생각인 것 같다. 자기 이름과 같은 탐정이 나오는 추리소설을 쓰는 아마추어 탐정은 아마도 안 나오지 않을까.

유괴살인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일인칭 화자인 야마쿠라 시로(<요리코를 위해>의 니시무라 유지와는 달리 그럭저럭 믿을 수 있는 화자이다. 정보를 재깍재깍 전달하지 않아서 탈이긴 하지만)는 아내 가즈미로부터 아들 다카시가 유괴되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허겁지겁 집으로 가보니 다카시는 집에 있고 유괴된 사람은 다카시의 친구인 시게루다. 경찰이 개입하고 야마쿠라는 범인에게 몸값을 전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데, 그만 계단에서 넘어져 정신을 잃고 만다. 그리고 시게루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앞의 문단이 소설의 기본 설정이고 이후는 출판사가 밝혀도 된다고 생각하는 스포일러 섞인 멜로드라마다. 알고 봤더니 야마쿠라는 임신 중인 아내를 간호하던 간호사 미치코와 짧은 불륜관계였고 시게루는 그동안 태어난 아이다. 그리고 다카시는 가즈미의 동생 쓰구미가 낳은 아들로, 동생이 죽자 야마쿠라와 가즈미가 입양한 것이다. 야마쿠라는 이 사건이 쓰구미의 남편이고 다카시의 친아버지인 소설가 미우라가 벌인 짓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미우라에겐 강철 같은 알리바이가 있으니 사건이 일어난 날 명탐정 노리즈키 린타로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요약만 해도 좀 숨이 막히는 상황인데, 조금씩 진상이 밝혀지고 새로운 가설이 제시되면서 막장 설정은 늘어만 간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상황만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야마쿠라는 자신이 이전엔 갖고 있는지도 몰랐던 어두운 면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걸 갖고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다.

소설의 심리 묘사는 옛 도서추리소설과 비슷하다. 주인공의 비겁하기도 하고 절절한 심리를 정확하고 깊게 파고 있지만, 거의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여전히 추리소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나중에 밝혀지는 주변 사람들의 심리와 동기도 마찬가지다. 이는 단점이 아니다. 이야기꾼에게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고 노리즈키 린타로는 추리소설 작가의 팔레트를 이용했을 뿐이다. <1의 비극>의 세계는 심지어 <요리코를 위해>의 세계보다 어둡다.

<요리코를 위해>와 마찬가지로, 레퍼런스를 대놓고 가져온 작품이다. 이 소설이 차용하고 있는 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본이 있는 미국의 고전추리소설인데, 제목을 밝히면 범인이 노출되는 스포일러가 된다. 단지 자유롭게 변주되어 있어서 작가가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간결하지만 교활한 알리바이 트릭이 있는데, 이는 존 딕슨 카의 모 소설 트릭과 구조가 비슷하다. (그리고 그 트릭은 존 딕슨 카가 처음 쓴 것도, 마지막으로 쓴 것도 아니다.) 다잉 메시지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어로 쉽게 번역되는 종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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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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