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6.02 조회수 | 1,428

페어플레이가 가능한 진지한 퍼즐

<시인장의 살인>의 뒤를 잇는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신작이 나왔다. 이번 소설의 제목은 <마안갑의 살인>. 정말 성의 없을 정도로 일본 본격 추리소설 같은 제목이다.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 <시인장의 살인>의 뒤를 잇는 속편이다. 독립된 범죄를 다루고 있지만 그래도 전편은 읽고 가는 편이 좋겠다. 그것도 사전정보 없이. 전편을 읽은 독자들은 아시겠지만 이 <시인장의 살인>이라는 책이 그렇게 정상적인 설정의 본격 추리소설이 아니고, <마안갑의 살인> 역시 그 어처구니없는 설정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장의 살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좀비가 나오는 본격 추리소설이다. 사방에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고립된 저택에서 좀비를 이용한 살인이 일어나고, 명탐정은 이와 관련된 밀실 트릭을 해결해야 한다. S.S. 반 다인이나 녹스 주교라면 어이없어 할 설정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러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좀비 역병은 분명 현실적인 사건이 아니긴 하지만, 마법 같은 건 아니다.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하면 SF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아이작 아시모프의 <강철도시>가 본격추리소설이라면 <시인장의 살인>도 별 문제없이 본격추리소설이 될 수 있다.

<마안갑의 살인>은 <시인장의 살인>의 사건이 일어나고 3개월 뒤에 일어난다. 전작의 주인공 겐자키 히루코와 하무라 유즈루는 <시인장의 살인>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의 배후인 마다라메 기관에 대해 수사 중이다. 이들은 관련된 단서를 따라 시골의 어느 마을에 있는 마인갑이라는 건물에 도착한다. 이 건물에 사는 사키미라는 노파는 그 마을에서 “남녀가 두 명씩 총 네 명이 죽는다”는 예언을 남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건물은 다리가 불타면서 고립되고, 전형적인 일본 본격추리소설 스타일의 클로즈드 서클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게 과연 그 예언이 맞다는 뜻일까? 누군가가 이 예언을 연쇄살인의 동기를 감추기 위해 이용하는 게 아닐까?

설정만 따진다면 <시인갑의 살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소설이다. 이번 책의 소재는 예언능력이다. 대놓고 초자연현상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기는 하다. 우리가 초자연현상이라고 부르는 건 아직 법칙이 밝혀지지 않은 자연현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시인장의 살인>과 <마안갑의 살인>의 모험이 펼쳐지는 유니버스가 어디까지를 허용하는지 아직 모른다. 이곳은 좀비는 허용하지만 예언은 허용하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전편에서 좀비는 어처구니 없었지만 척 봐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언은 아닐 수도 있다.

이 세계가 어떤 곳이건, <마안갑의 살인>은 멀쩡한 본격 추리소설로 기능한다. 존 딕슨 카의 <화형법정>이나 얼마 전에 다룬 기도 소타의 <그리고 유리코는 혼자가 되었다>와는 달리, 이 소설은 반전도형식 애매함 따위는 허용하지 않는다. <마안갑의 살인>에 나오는 모든 설정들은 페어플레이가 가능한 진지한 퍼즐의 재료가 되고, 겐자키 히루코가 “세 시간 후, 식당에 모여주시겠어요? 거기서 범인을 밝히겠습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어떤 기만도 없는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탐정이 누군지도 모른 채 시작했던 전작과는 달리, 이번 소설부터는 겐자키 히루코 시리즈로 굳어졌다. 전작에서 ‘미소녀 탐정’을 바라보는 대상화된 시선을 지적했는데(일본 퍼즐 미스터리와 좀비물의 결합…익숙하면서 보기 드문 구경거리, 북DB 2018. 8. 8), 이번 책에는 그런 게 많이 줄었고, 대신 로맨스의 분위기가 살짝 강해졌다. 이런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반 다인의 소설작법 20 규칙 중 3번인 ‘이야기 중에 연애적인 흥미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를 들이밀고 싶다. 하지만 이미 좀비와 예언능력까지 건드린 시리즈에서 이 규칙은 좀 허망하게 느껴진다.

참, 전편인 <시인장의 살인>은 2019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국내 수입은 안 되었지만 예고편은 유튜브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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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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