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5.26 조회수 | 1,625

보험회사 직원 출신 두 작가...카프카 vs 페루츠

열린책들에서는 2019년부터 레오 페루츠의 책들을 번역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결국 어제 한 권을 읽었다.

페루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다면, 1882년 프라하에서 태어난 수학자이자 소설가로, ‘관념적 주제를 속도감 있게 그리는 환상 소설의 대가’라는 평판을 받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고 역시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프란츠 카프카와 여러 모로 비교된다. 단지 생전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가 사후에 명성을 얻은 카프카와는 달리, 페루츠는 당대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잊혔고 사후에 다시 재발굴된 작가이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세 권의 장편소설 이전엔 파울 프랑크와 공저한 <망고나무의 비밀>이 번역된 적 있고, 이 책은 읽은 기억이 난다.

이번 주에 다룰 페루츠의 책은 <심판의 날의 거장>이다. 1921년작이니, 올해로 꼭 100살이 됐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선정한 범죄 소설 시리즈 ‘제7지옥’에 수록되었고, 칼 에드워드 와그너가 ‘초자연현상을 다루지 않은 호러 소설 13편’ 중 하나로 선정한, 페루츠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보르헤스나 비오이 카사레스가 좋아했을 법한 책이다.

소설의 화자는 퇴역한 용기병 대위인 요슈 남작이다. 남작이 기록한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1909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의 자택에서 궁정배우 오이겐 비쇼프가 갑자기 권총자살을 하고 그 때 저택에 있었던 요슈 남작은 비쇼프를 자살로 몰고 갔다는 비난을 받는다. 비쇼프의 아내 디나가 남작의 옛 애인이었고 비쇼프를 자살로 몰고 갈 수 있는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디나의 동생 펠릭스의 고발로 명예재판소에 끌려갈 위기에 처한 남작은 누명을 벗기 위해 수사에 나서고, 같은 시간, 저택에 있었던 엔지니어 졸구르프와 고르스키 박사가 이에 참가한다. 졸구르프가 요슈 남작의 무죄를 믿는 이유는 전에 비슷한 연쇄 자살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비슷한 종류의 사건들이 계속 일어난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소설의 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지만 졸구르프가 들려주는 연쇄 자살의 이야기는 다른 데에서 들은 적 있다. 언젠가부터 그 이야기만 떨어져 나와 도시전설처럼 돌았던 적이 있는 모양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애거서 크리스티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같다’라는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의 인용구가 책 도입부에 소개되어 있는데, 크리스티 대신 존 딕슨 카를 넣어야 더 그럴싸할 것 같다. <심판의 날의 거장>엔 크리스티 소설을 특징짓는 일상성과 사실적인 풍속묘사는 없다. 대신 초자연 현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는 기괴한 사건, 화자의 현학취미와 구세대 귀족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비교대상으로 불러오고 싶은 또다른 작가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다. 소설의 구조, SF와 판타지의 경계에 있는 장르 재료를 다루는 수법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유사하다. 현실 과학에 바탕을 두지는 않지만 초자연적인 설명에 의존하지 않는 해답을 상상해 보라.

생전에 인기가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단 재미있는 소설이다. 종종 장황해지는 문체는 예스럽지만 그렇다고 읽기 어려운 건 아니다. 이야기 진행 속도는 빠르고 긴장감 넘친다. 초반에 제시되는 미스터리는 매혹적이고 해답은 만족스러운 동시에 명쾌하다. 읽는 동안에도 과연 감정이입을 하고 믿어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요슈 남작은 재미있는 일인칭 주인공이다. 앞에 명쾌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페루츠는 소설의 액자구조를 이용해 복수의 설명이 가능하도록 겹겹의 레이어를 깔았고 그 결과 소설의 내용과 인상은 훨씬 풍요로워졌다.

그래도 카프카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가볍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 이 비교는 무의미한 것 같다. 페루츠와 카프카가 보험회사 주최 작가 대회에 출전해 경쟁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카프카보다 가볍고 읽기 쉽다는 게 과연 단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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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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