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5.20 조회수 | 1,169

영웅 거부! 평범한 한 사람의 성취는 모두의 성취

<마션>의 앤디 위어가 <프로젝트 헤일메리>라는 제목의 신작 장편을 냈다. 척 봐도 위어가 썼을 법한 재미있는 정통 하드 SF인데,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가 된다. 엄청나게 대단한 반전을 숨기고 있느냐? 그런 건 아니다. 틀 자체는 20세기 중엽에 나왔어도 이상할 게 없을만큼 친숙하다. 전성기의 할 클레멘트가 최근의 과학을 소재로 썼다면 나왔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깨어나서 “나는 누구냐, 그리고 도대체 여기는 어디냐?”라는 존재론적 고민을 하면서 시작하는 소설은 백지 상태에서 읽어주는 게 좋다. 라이언 고슬링 주연의 영화가 곧 만들어질 예정이라니 아무 정보 없이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원고를 끝낼 수는 없다. 그러니 1500자 정도 더 이야기할 텐데, 될 수 있는 한 책을 읽고 다시 오시길 바란다.

내용 설명을 조금 더 해보자.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주인공이다.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주인공은 자신이 라일랜드 그레이스(대놓고 고른 말장난 이름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Hail Mary, Full of Grace’) 라는 이름의 과학교사이며 지금 우주적 재난에 휘말려 멸망을 앞둔 지구를 구하기 위해 낯선 항성계에 있는 헤일메리라는 우주선에 탑승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는 동안 과거의 지구와 현재의 우주선을 오가며 온갖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독자는 주인공과 우주적 재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아니, ‘조금씩’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위어가 페이지마다 쏟아붓는 정보량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기 때문에.

초반엔 당연히 헛갈린다. 최고의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과학교사가 거기 있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건, 분명 시대배경이 지금의 현대에서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근미래인데도, 주인공이 다른 항성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위어는 여기서부터 항성간 여행과 우주적 재난을 하나로 엮는 근사한 SF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지금까지 위어가 최대한 현실과학만을 재료로 삼아 세계를 만들려 했다면 이번엔 그 단계를 뛰어넘는다. 벌어진 상황만 보면 멸망의 공포와 SF팬의 소망성취가 뒤섞인, 거의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의 대소동이지만, 그래도 위어는 대충하는 것 없이 최대한 과학적인 기반을 넣으려 하고 있고 그러는 동안 지구 주변의 우주공간은 훨씬 재미있어진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과학철학적 질문도 있다. 어떤 고등 문명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할 클레멘트의 이름을 꺼냈는데, 이 사람과 관련된 유명한 패러독스도 진지하게 분석된다. 그렇다고 그게 완벽한 설명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낙천적인 책이다. <마션>에서 그랬던 것처럼, 위어는 인간, 그러니까 지적 존재의 선함과 과학기술의 힘을 믿는다. 종종 너무 천진난만해 보여서 쿡쿡 찌르며 놀려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종족의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게으르고 냉소적이고 의심 많은 캐릭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인공이 선하고 영리하고 유능할수록 좋은 이야기다. 인간의 추악함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충분히 할 수 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영웅과 천재 캐릭터에 대한 맹렬한 거부이다. 위어는 그레이스를 영웅으로도, 천재로도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주인공을 하찮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레이스는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상황에 밀려 억지로 영웅 역할을 하게 된 평범한 사람이다. 그건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 로키도 마찬가지다. (로키에 대해서는 출판사 보도자료도 최대한 정보를 숨기려 하고 있는데, 이미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유를 알 것이다.) 그레이스가 초반에 거둔 성과를 보면 적당히 천재로 만들어도 다들 넘어갈 텐데, 위어는 안 그런다. 그레이스는 수많은 동료들로 이루어진 과학 집단의 일원이고 이 사람의 성취는 이들 모두의 성취이다. 그리고 이 장엄한 협력의 시스템은 종의 장벽을 넘어선다. 이 모든 과정은 과도할 정도로 로맨틱하지만, 로맨티시스트는 좀 그래도 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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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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