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5.12 조회수 | 1,808

‘장르 시조새’들의 여성혐오 관습에 대한 뒷담화

내가 알기로 사라 파레츠키의 탐정 V.I. 워쇼스키가 주인공인 장편소설 중 정식 번역된 건 두 편이다. 1982년에 나온 첫 작품인 <제한보상>과 2003년에 나온 11번째 작품인 <블랙리스트>. 1990년대엔 <여탐정 워쇼스키 1>과 <섬머타임 블루스>라는 책이 나왔는데, <여탐정 워쇼스키 1>은 아마 <제한보상>인 것 같고, <섬머타임 블루스>는 정체가 뭔지 짐작이 안 간다. 참, 나는 이 캐릭터를 1991년에 나온 영화 ‘여형사 워쇼스키’를 통해 처음 접했다. 두 번째 소설인 < Deadlock(데드록)>을 각색한 작품으로, 캐슬린 터너가 주연이었는데, 흥행성적이 좋지 않아 시리즈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V.I. 워쇼스키는 수 그래프턴의 킨지 밀혼처럼 1인칭 하드보일드 여성 주인공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두 사람은 모두 1982년에 데뷔했다. 킨지 밀혼이 느릿느릿 나이를 먹으며 1980년대에 머물렀다면, 워쇼스키는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으며 21세기를 살고 있다. 단지 최근 몇 년 전부터 나이가 몇 살 젊어졌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아무래도 하드보일드 주인공의 특성상 몸을 쓰는 일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워쇼스키와 밀혼은 모두 남자주인공이 당연시되던 장르에 뛰어든 맹렬한 여성들로, 이들의 도전 이후 수많은 여성 주인공들이 추리소설 장르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하드보일드이건, 다른 무슨 서브장르이건, 여성주인공은 정상화되었다. 그리고 2019년 에드거상 시상식에서 사라 파레츠키는 19번째 워쇼스키 시리즈인 <쉘 게임>으로 수 그래프턴 사후에 생긴 수 그래프턴 기념상을 수상한다.

사라 파레츠키의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워쇼스키 소설이 아니다. 2007년에 출간된 에세이다. 구체적인 시기를 아는 건 중요하다. 당시는 조지 W. 부시 시절로, 파레츠키는 책 여기저기에서 9.11 이후 극우화되어가고 있던 미국 사회에 대한 불타는 분노를 불 뿜는 용처럼 쏟아내고 있다. 읽다 보면 더 끔찍했던 트럼프 시대를 작가가 어떻게 버텼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우리보다 강하고 야무진 사람들의 걱정은 하는 게 아니다. V.I. 워쇼스키 신작은 2020년에도 나왔다. 당시의 분노가 자양분이 되었을 거라 믿는다.

책의 초반은 자서전이다. 보수적인 미국 중서부에서 태어나 진보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고 1960~1970년대 인권운동과 페미니즘의 격동기를 거친 작가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꼼꼼하게 그려진다. 작가가 V.I. 워쇼스키 소설을 쓰는 지점까지 가려면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워쇼스키 시리즈를 소개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이 시기를 통과하며 의식화된 작가가 어떻게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주인공을 만들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남자들이 남자 하드보일드 소설 탐정 주인공을 만들어 쓰는 건 그냥 중립적인 일상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여성작가가 여성 하드보일드 탐정을 만드는 건 정치적인 행위이다. 당연히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그 상황에서 작가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했는지가 먼저 나와야 한다. 작가가 여성주인공이 나오는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여성 미스터리 작가와 지망생들을 지원하는 ‘시스터스 인 크라임’을 설립하여 현실 세계의 변화를 추구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중반 이후는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이라는, 태생적으로 여혐적인 장르 안에서 어떻게 보면 대놓고 원형적인 캐릭터를 여성으로 만들어 현대 배경의 소설을 쓰는 작가의 고민에 대한 글이다. 여기서부터는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와 같은 장르 시조새들의 여성혐오적 관습에 대한 비판과 뒷담화가 이어진다. 아마 장르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부분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데, 그렇다고 비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파레츠키도 이들이 만든 장르 원형에 매료되어 글을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단지 아무리 원형적인 사립탐정을 만들어 하드보일드 소설의 틀 안에서 글을 쓴다고 해도 작가가 여성이고 주인공이 여성이며 이들이 동시대를 살면서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 반영되면 소설은 미개척지인 다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인터파크도서 북DB www.book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영웅 거부! 평범한 한 사람의 성취는 모두의 성취 2021.05.20
미국인 손녀가 ‘해님 달님’ 이야기를 만났을 때 2021.05.06
댓글 주제와 무관한 댓글은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