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2.17 조회수 | 1,456

변신과 사치의 대리만족…위기감은 덤

오늘 소개할 책은 정말로 아주 정보 없이 골랐다. 김영주의 <증발된 여자>라는 소설인데, 고즈넉이엔티라는 회사에서 나온 케이 스릴러 시리즈의 한 권이다. 출판사에 따르면 케이 스릴러는 ‘한국 스릴러 장르문학의 해외 진출을 위해 개발한 국내 유일의 스릴러 소설 브랜드’라고 한다. 웹툰이나 드라마 같은 다른 매체로의 각색도 기획하는 것 같다.

1부의 내레이터이고 소설의 주인공인 오수완은 20대 후반의 여성이다. 몇 년 동안 극단 소속이었지만 제대로 된 역할을 맡은 적이 없고 간신히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만 일이 꼬여 거기서 나왔다. 연하의 남자친구랑 동거 중이었는데, 이 인간이 전 재산인 보증금을 들고 튀었다. 수완은 심지어 임신한 상태. 주인공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 작가가 작정한 것이 보인다.

다행히도 수완은 극단 대표가 하고 있는 스포츠 센터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의 골드회원인 허경진이라는 여자가 수완에게 접근해온다. 죽은 여동생인 남경의 역할을 해달라는 것. 수완은 덜컥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경진은 당연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그 뒤에는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수완에겐 이를 거절할 힘이 없다.

전통적인 모던 고딕 소설의 도입부다. 밑바닥에 떨어진 젊은 여자가 신분을 위장하고 부자들이 사는 화려한 세계로 들어간다. 변신과 사치의 대리만족이 독자들을 기다린다. 언젠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초라함이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덤이다. 이 장르에서 이런 불안감은 매운 향신료처럼 그 사치의 맛을 더해주는 것 같다. 포르셰를 몰고 고급 식당에 가는 사치가 일상이라면 그것도 좀 재미없지 않을까. 단지 나는 재벌들이 나오는 한국어 책을 읽으며 진짜로 호사스러운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한다. 대신 상상되는 건 일일연속극의 방송국 세트와 짧고 단조롭게 현을 긁어대는 성난 배경음악인데, 이건 내 한계이니 누굴 탓할 일이 아니다. 경진이 독일 교포여서 종종 독일어 대사가 등장한다는 점도 언급해야겠다. 순전히 멋스러운 이유로만 존재하는 외국어도 이런 연속극의 특징이니까.

일반적인 모던 고딕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에선 이성애 로맨스가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름없는 주인공을 포함한 세 여자의 애증을 그린 <레베카>에서도 주인공과 맥심 드 윈터의 로맨스가 비교적 큰 비중으로 그려지는데, 이 소설에는 그런 상상이나 기대가 가능한 남자들이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수완과 경진의 관계이고 다른 사람들은 도구에 불과하다.

3인칭으로 넘어가는 2부부터의 사건을 요약하려 한다면 당연히 모든 게 스포일러가 된다. 그래도 이 두 가지는 언급해야 할 거 같다. 첫째 사건전개는 예상보다 훨씬 폭력적이다. 잔혹 묘사가 구체적인 건 아니지만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만만치 않고 오싹한 범죄자의 사고 방식이 이 위에서 군림한다. 둘째로 수완과 경진의 관계는 이기적인 범죄심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단순하지는 않다. 작가는 극도로 부정적일 수 있는 상황에서 가능한 감정과 관계의 복잡성을 추구하려 했던 것 같다. 하이스미스 소설의 재료가 여기저기에 보인다.

단지 충분히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끝없이 이어지는 살인은 선정적인 자극을 주지만 (선정적이라는 것 자체는 단점이 아니다) 한국배경 스릴러에서 독자가 기대하는 사실성을 계속 위협한다. 종종 이 나라가 모든 사람들이 지문이 찍힌 신분증을 갖고 다니는 경찰국가라는 것, 유전자 검사가 이미 일상의 영역이라는 걸 작가가 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순전히 막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는 2부로 넘어가면서 1인칭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적당히 정보를 누락하는 전지적 화자는 이야기를 편리하게 만들긴 한다. 하지만 일단 일관성이 깨지고, 이 편리함도 경진 캐릭터를 살리는 데에 그렇게까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게 산문적이고 평범해진다. 이런 식으로 정보를 주는 대신 수완의 상상력과 관점으로만 경진을 그렸다면 훨씬 재미있는 초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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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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