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1.27 조회수 | 1,248

완전히 믿을 수 없는 화자…여성 주도 서스펜스물

저번 주에 소개했던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이 재미있는 책이어서 작가인 루스 웨어의 전작인 <우먼 인 캐빈 10>을 읽었다. 번역제가 마음에 든다고는 말할 수 없다. 충분히 어려움 없이 번역할 수 있는 제목을 이렇게 영어 그대로 남겨두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이런다고 제목이 더 멋있어지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무대는 오로라 보리알리스호라는 초호화 크루즈선이다. 크루즈선이라고는 하지만 큰 요트 정도 크기의 작은 배이며 엄선된 소수의 승객에게 서비스한다. 주인공인 로라 블랙록은 ‘벨로시티’라는 여행잡지의 기자로, 이 배의 첫 항해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배에 탔다. 며칠 뒤, 우리의 주인공은 어떤 여자가 배에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선원들이 와보니 살인현장은 완벽하게 청소되었고 그 여자가 있던 10번 선실에는 원래 승객이 없었다. 로라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배 전체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정신이 이상한 것일까?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 같다고? 그건 루스 웨어가 고전적인 도시전설에 기반을 둔 설정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라진 호텔 방의 미스터리’, 또는 ‘파리 만국박람회 실종사건’이라고 불린다. 이런 이야기다. 모녀가 낯선 도시(주로 만국박람회 당시의 파리로 설정되어 있다)의 호텔에 머문다. 어머니가 아파서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딸은 관광을 떠난다. 그런데 호텔에 돌아와보니 머물렀던 호텔 방이 사라졌고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존재를 모른다. 나중에 호텔 측에서는 어머니가 전염병에 걸려 죽었고 호텔은 관광성수기를 놓칠 수 없어서 이를 은폐했다고 설명한다.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에서 이 이야기의 비교적 충실한 각색물을 만든 적 있다. 이 에피소드의 주연배우는 히치콕의 딸 퍼트리샤 히치콕이었다.

이를 변주한 작품들은 꽤 많은데, 그중 두 편이 유명하다. 하나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초창기 고전 ‘사라진 여인’이다. ‘숙녀 사라지다’ 또는 ‘반드리카 초특급’이라는 번역제로 알려진 작품인데 에델 리나 화이트의 ‘The Wheel Spins’라는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마거릿 록우드가 연기한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노부인이 열차 안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하나는 존 딕슨 카의 라디오 드라마인 ‘B-13 선실’로, 신혼여행차 유럽 행 여객선의 탄 주인공의 남편이 사라진다. 이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대놓고 ‘파리 만국박람회’ 사건을 초반과 중반에 언급하기도 한다.

<우먼 인 캐빈 10>은 ‘사라진 여인’보다는 ‘B-13 선실’에 가까운 소설이다. 일단 무대가 여객선이니까. 여객선은 현대 배경 서스펜스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 고맙기 짝이 없는 장치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언제든지 인터넷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오로라호는 향수가 돋을 정도로 크리스티스럽다. 부유한 사업가, 패션모델, 사진작가, 기자 같은 용의자들이 초반에 줄지어 차례로 등장할 때는 황금시대 추리소설의 패러디를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소설은 실제로도 당시 쓰인 정통 추리소설에서 썼을 법한 트릭을 숨기고 있다. 진상을 알면 대충 수긍이 가고 반박할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그래도 기괴하게 인위적인 음모 말이다. 분명 1920년대나 1930년대에 비슷한 설정의 트릭을 누가 먼저 만들었을 것 같긴 한데, 굳이 그걸 추적해야 할까.

고전 퍼즐 미스터리의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우먼 인 캐빈 10>은 정통 추리보다는 완전히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내세운 여성 주도 서스펜스 물에 가깝다. <걸 온 더 트레인>이나 <우먼 인 윈도> 같은 최근 유행 소설들을 떠올리면 되겠다. 로라는 심지어 독자도 그렇게까지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얼마 전에 강도가 들어 정신이 없는데, 원래부터 십여 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독자들이 로라를 안 믿는 건 아닌데, 루스 웨어는 여기에 약간의 서술 트릭을 써서 주인공의 앞날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트릭에 그냥 넘어가는 독자도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증 유발 도구로서는 효과적이다. 이 이야기에 차별화를 부여하는 것은 대부분 진상이 밝혀진 뒤의 드라마이고 여기서부터 예상밖의 관계가 발전하는데, 더 이상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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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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