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12.09 조회수 | 2,810

예쁜 고양이 사진을 좋아하는 ‘착한’ AI

SF를 읽다 보면 작품이 나왔을 때는 당위성 있는 예측이었던 것이 지금은 현실화되어 여분의 현실성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작가는 예언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겹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작품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나오미 크리처의 단편 ‘너무 많은 요리’가 그런 예 중 하나다. 이 단편은 2018년의 미래가 배경인 2015년작이다. 소설은 요리 블로그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작품 중간중간에 꾸준히 다양한 요리 레서피가 소개된다. 하지만 진짜 스토리는 그 뒤에 있다. 이 소설 속 미국은 조류 독감이 대유행 중이다.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음모론이 판을 치고 생필품은 동이 나고 사회적 거리 두기만이 유일한 답이다. 그래도 이 소설 속 미국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의 미국인들보다 말을 잘 듣는 것 같다. 아무래도 치사율이 높아 자기기만이 안 통하니까 그렇겠지.

이 소설의 미래 예측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크리처가 이 분야의 전문가인 것도 아니고, 당시엔 정말 모두가 언젠가 이와 유사한 일이 터질 줄 알았다. 그러니 지금 이 고생을 하는 우리가 더 열 받는 것이다. 다들 알고 있었다면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잖아.

‘너무 많은 요리’는 얼마 전에 나온 나오미 크리처의 단편집 <고양이 사진 좀 부탁해요>에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이다. 17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SF보다는 판타지의 비중이 더 크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타이틀 작 ‘고양이 사진 좀 부탁해요’는 AI를 다룬 정통 SF로, 크리처는 이 작품으로 휴고와 로커스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AI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능하거나 사악한 AI의 스테레오 타이프와 거리가 먼 존재로, 고양이 사진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돕고 싶어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도우려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에 예쁜 고양이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이다. 아시모프가 보았다면 낄낄거렸을 법한 깜찍한 이야기다.

역사 이야기에 판타지, SF를 섞은 작품들이 많다. ‘블레싱 계곡에서 일어난 일’은 서부 개척사를 다룬 이야기인데, 이 세계의 서부엔 마법사와 드래건들이 산다. 가상의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모던 판타지의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일어난 일이랄까. ‘골렘’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라하에서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골렘의 이야기다. 단지 이 이야기에서는 창조주도, 골렘도 모두 여자다. 미래를 예측하는 골렘은 창조주들이 죽으면 자신이 해방될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미래가 오는 걸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할머니 동지’에서 주인공은 소련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바바야가에게 소원을 빈다. ‘베를린 장벽’에서는 미래에서 온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나 1980년대 후반을 사는 주인공에게 서독으로 유학을 가라고 설득한다. 우리로서는 그 여자를 믿을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을 갖고 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몇몇 단편들은 개인적이다. ‘스트랩 드래건’은 드래건이 나오는 동화의 패러디인데, 지인의 병원비를 대기 위한 자선 행사 경매를 위해 쓰였고 경매를 낙찰받은 친구의 아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불사의 사기꾼이 나오는 판타지인 ‘정직한 남자’의 주인공인 아이리스는 주인공의 할머니가 모델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로맨스를 품고 있다. ‘착한 아들’에서 아일랜드의 정령인 주인공은 미국인 대학생과 사랑에 빠져 미국으로 건너오는데, 신분을 조작하기 위해 자기가 아들이라는 가짜 기억을 심은 노부부의 삶에 얽히게 된다.

읽다가 종종 코니 윌리스를 떠올렸다.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 단편들을 읽을 때도, 대유행병이 창궐하는 ‘너무 많은 요리’를 읽을 때도 그랬고, 외계인과 지구인 커플에게 섹스 토이를 파는 사업가들이 나오는 ‘비츠’같은 단편을 읽을 때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너무 그 유사성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크리처는 윌리스처럼 정신없이 호들갑스럽지 않고 관심 방향이나 스타일도 다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낙천적이고, 귀엽고, 유머가 풍부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작가라는 공통점은 있다.

작가가 트위터를 한다.(계정 @NaomiKritzer) 지금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된 트윗을 열심히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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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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