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12.02 조회수 | 2,177

미소 냉전이 인공지능 대결이었다면? 어이없고 과감한 상상력

한나 렌의 단편집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나에게 뚝 떨어진 책이다. 2010년에 ‘소녀금구’라는 호러 단편으로 데뷔했고 그 뒤로 꾸준히 SF 단편들을 냈으며 이번이 첫 SF 단편집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밀도가 굉장히 높다. 장르의 경험이 풍부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단단한 세계를 쌓아 올리는 작가의 작품들이다.

수록된 작품 중 세 편은 대체 역사물이다. ‘제로연대의 임계점’은 일본 SF 역사가 20세기 초 여자학교의 세 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상상으로 출발한 작품이고, ‘홀리 아이언 메이든’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 여자 덕택에 일본이 비교적 평화롭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그 동생의 편지를 통해 그려 보인다.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재미있는데, 이들 중 가장 어이없고 과감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싱귤래리티 소비에트’다. 소설은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이벤트, 그러니까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부터 시작된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딘 것까지는 우리가 아는 역사와 겹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성조기가 소련 국가로 바뀌고 착륙선 옆에 스탈린의 동상이 나타난다.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앨런 튜링이 소련에 망명한 (또는 소련에 납치된) 이후 소련의 인공지능 기술은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공지능 보댜노이는 1960년대에 드디어 기술적 특이점을 넘어섰던 것이다.

이후 한나 렌이 그리는 세계는 정말 SF적 상상력의 신세계다. 우주 경쟁으로 알고 있던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보댜노이와 미국이 개발한 인공지능 링컨의 대결로 재구성된다. 소련 인민들이 보댜노이에게 뇌의 일부를 맡기고 환상적이고 불가해한 현실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자본주의의 패배를 견디지 못한 미국인들은 링컨이 만든, 소련이 붕괴된 역사를 담은 가상 세계로 도피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들이 만든 허구의 역사인 것인데... 링컨은 사악한 블랙 유머의 소유자이고 아마 정말로 인간들을 싫어하나 보다.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은 원형적인 SF 로맨스다. 정말로 처절한 로맨스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그리는 미래는 뇌과학의 발전으로 자기 자신의 감정을 조작할 수 있는 세계이다. 이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풀릴 것 같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러기엔 너무 배배 꼬여있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긴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는 저속화라는 정체불명의 현상을 다룬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을 태운 (여기서 한국인 독자들은 추가적 감정을 얹게 된다) 신칸센 열차가 갑자기 정지하고 그 안에 탄 사람들은 모두 시간 속에 굳어버린다. 아주 멈춘 건 아니고 시간이 2600만분의 1의 속도로 아주 느려진 것이다. 이 속도라면 이들은 서기 4700년에 다음 역인 나고야에 도착할 것이다. 데이비드 브린이 ‘시간의 강’에서 다룬 것과 비슷한 아이디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상상력의 진행 방향은 전혀 다르다. 가장 차이를 보이는 것은 역시 일본 청소년물의 강한 향취이다. 주인공들이 은근슬쩍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상상되는 작품이다. 주제가도 들리는 것 같다.

타이틀작인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역시 ‘미아하에게 건내는 권총’처럼 자유의지를 다룬다. 하지만 상상력의 스케일이 더 커졌다. 소설이 그리는 세계는 처음엔 우리가 사는 곳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독자들은 여름의 절정인데도 창밖에 눈이 쌓인다는 묘사엔 당황하게 된다. 기후 이변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승각’이라는 기관을 갖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다양한 평행우주를 넘나들 수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에 승각에 장애를 입은 학생이 전학 온다. 아이디어와 묘사는 작가가 에피그래프에서도 인용한 R.A. 래퍼티를 연상시키지만 감성과 진행 방향은 전혀 다르고 소설이 그리는 심상은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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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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