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11.25 조회수 | 770

책 서평을 대신 써주는 기계가 발명된다면?

늘 궁금했던 것. 히가시노 게이고의 애독자들은 책을 어떻게 보관할까? 지금이야 전자책이라는 대안도 있지만 그래도 전작을 종이책으로 모으는 사람들도 꽤 있을 텐데, 이렇게 최애 작가가 작품을 잡지 찍듯 낸다면 그 부피는 결코 무시 못 할 수준이 아닐까?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다작가의 특징 중 하나는 정말 온갖 이야기들을 같은 페이스로 술술 쏟아낸다는 것이다. 그중 일부는 전혀 야심이 없는 작품일 수도 있고, 괴상한 실험작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얼마 전에 번역된 2001년 작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도 이 둘에 속한 단편집이다.

일종의 메타 추리소설이다. 이 작가에겐 이게 처음이 아니다. <명탐정의 규칙><명탐정의 저주>와 같은 책들이 있었으니까. 단지 앞의 책들이 전문작가의 입장에서 본격 추리소설의 클리셰를 풍자하거나 재해석한 작품이라면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은 업계 사정을 알고 있는 작가가 추리소설을 써서 출판해 팔아먹는 동네의 다양한 사정을 소재로 쓴 코미디 모음집에 가깝다.

첫 단편인 ‘세금 대책 살인사건’만 봐도 대충 책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추리작가인 일인칭 화자는 ‘얼어붙은 거리의 살인’이라는 제목의 연재 추리소설의 10회분을 쓰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액수의 세금 계산서가 날아든다. 세금 환급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그동안 쓴 모든 돈을 경비로 처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몇 달 전에 다녀온 하와이 여행 같은 걸 소설에 반영해야 하는데,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에 어떻게 하와이를 쑤셔 넣는다?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의 소동은 조금 서글프다. 젊은 독자들이 책을 안 읽고 신인 작가들도 줄었다. 그러다 보니 나이 든 독자들과 나이 든 작가들만 남았다. 주인공인 편집자는 아흔이 넘은 원로작가의 추리소설 ‘눈의 산장 자산가 딸 밀실 살인사건’의 원고를 읽고 있는데, 암만 봐도 이 양반, 치매에 걸렸다. 시대가 예스러운 건 그렇다고 쳐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고 한 번 죽은 사람이 또 죽기도 한다. 이 망가진 원고를 어떻게든 고쳐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편집자의 일.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크리스티의 끔찍한 말년작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의 어휘를 조사해 작가의 치매 증상을 집어낸 연구가가 있다. 어떤 작가들은 정신이 망가진 이후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단지 이 단편은 철저하게 허구이기 때문에 독자는 그 파편화된 이야기를 논리를 초월한 초현실주의 문학처럼 읽을 수 있다.

‘장편소설 살인사건’은 내가 100퍼센트 감정이입하며 읽었던 단편이다. 3년 만에 원고지 600장 분량(일본은 원고지 한 장이 400자다)의 장편 ‘모래의 초점’을 완결한 주인공은 출판사로부터 작품 분량을 늘려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억지로 없어도 되는 문장들을 넣어 분량을 늘리지만, 내용이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출판사의 요구는 멈출 줄을 모른다.

‘독서 기계 살인사건’은 로알드 달의 모 단편이 연상되는 SF다. 시시한 신작 소설을 읽은 데에 진력이 난 평론가에게 서평을 대신 써주는 기계를 파는 외판원이 방문한다. 그리고 그 기계를 만드는 회사는 점점 그 영역과 기능을 넓혀가고 그러는 동안 출판 세계에서 인간의 역할은 줄어들어 간다.

그렇다고 여기에 추리물이 없는 건 아니다.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문제편‧해결편)’은 메타지만 정통이기도 하다. 다작가인 추리작가가 결말을 감춘 추리소설 원고를 네 명의 편집자에게 주고 범인을 맞힌 사람에게 다음 소설의 원고를 주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작가는 살해당하고... 이다음부터 허구와 사실의 층이 계속 겹쳐지는데, 그래도 결말을 보면 의외로 공정한 본격 추리물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책이다. 몇 개는 말 그대로 그냥 일차원적인 농담이고 ‘예고소설 살인사건’ 같은 건 이 책의 다른 소설에서 농담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진부하다. 그래도 읽다 보면 이미 사양 사업이 된 출판계에서 끙끙대며 책을 쓰고 만들고 평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접할 수 있어 찡하다. 그런 이야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책을 수월하게 쓰는 것처럼 보이는 다작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나온다면 더 애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인터파크도서 북DB www.book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미소 냉전이 인공지능 대결이었다면? 어이없고 과감한 상상력 2020.12.02
케이팝 업계 내부인이 쓴 자기 경험 바탕 소설 2020.11.18
댓글 주제와 무관한 댓글은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