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10.28 조회수 | 1,131

가난한 여자 죽음엔 무관심? ‘이등시민’ 취급에 분노한 여성 탐정

현대문학에서 <윌키 콜린스> 단편집이 나왔다. 이 중 ‘꿈속의 여인’, ‘아주 기묘한 침대’는 시사영어사에서 영한대역본으로 나온 적이 있다. 단편 번역이 더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 절판되거나 품절되었고 콜린스의 작품만을 모은 두꺼운 단편집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누가 뭐래도 콜린스는 빅토리아조 영국의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이니 말이다.

이 중에서 내가 추천받은 작품은 ‘앤 로드웨이’다. 이 짧고 소박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19세기의 여성 탐정이다.

문학사상 최초의 여성 탐정은 누구일까? 이건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누군가를 최초라고 찍으면 반드시 그 선례가 나오는 게 이 동네의 풍경이니 말이다. 게다가 추리장르의 역사기술은 지나치게 영어 소설 중심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일단 ‘모르그 거리의 살인’을 추리소설의 시조로 보고 영어 소설의 전통에서 첫 여성 탐정을 찾는다면 대부분 앤드루 포레스터가 1861년 또는 1864년에 창조한 '여성탐정(The Female Detective)' 시리즈의 글래든 부인이 최초라고 본다. 이 이야기는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이야기를 할 때 이미 했다. 하지만 글래든 부인은 시리즈 주인공인 전문 탐정으로 최초이고 그 이전에도 범죄사건에 뛰어든 여자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캐서린 크로우라는 영국작가가 1841년에 'Adventures of Susan Hopley; or, Circumstantial Evidence'라는 책을 냈는데, 주인공 가정부 수잔 호플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명탐정’의 선례처럼 여겨지는 활동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윌키 콜린스가 1856년에 찰스 디킨스의 잡지 'Household Words'에 ‘앤 로드웨이’를 발표한다. 그리고 이 단편은 빼도 박도 못할 정통 추리물이다.

앤 로드웨이는 셜록 홈즈가 아니다. 명탐정에게 필요한 전문지식 같은 건 없다. 그냥 19세기 영국 소설에 자주 나오는 가난한 독신 여성이다. 소설은 일기 형식을 취하는데, 이야기가 시작되는 1840년에 앤은 26살이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 로버트는 미국에서 문방구 사업을 하려다 심각하게 망해서 런던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는 중이다. 앤은 혼자 살면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다. 마음 터놓고 지내는 같은 하숙집 친구 메리 멜린슨도 역시 재봉사다. 하지만 앤과 달리 실력이 많이 떨어지고 끔찍한 가족관계 때문에 우울증에 빠져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콜린스의 장편 <월장석>의 로잰나 스피어맨과 루시 욜란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단지 <월장석>과는 달리, ‘앤 로드웨이’는 전적으로 이 여자들의 이야기다.

이야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메리는 길거리에 쓰러진 채 발견된다. 의사와 경찰은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다 머리를 인도에 찧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메리의 오른손 주먹에서 남성용 크라바트의 끝부분을 발견한 앤은 이것이 범죄라고 생각한다. 메리는 며칠 뒤에 세상을 뜨고, 앤은 가난한 여자의 죽음엔 별 관심이 없는 경찰을 대신해서 수사에 나선다. 다행히도 앤은 끈질긴 탐정이고 수사를 시작할 수 있는 약간의 운이 따른다.

부유한 유산계급의 이야기인 <월장석>에도 이들의 분노는 있었다. 특히 친구의 죽음에 분노하는 루시 욜란드의 캐릭터가 그랬다. 그 소설에선 계급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남자주인공의 관점에서 이 캐릭터가 그려지기 때문에 지금 와서 읽어보면 묘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앤 로드웨이’는 단순명쾌하다. 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 분노하고 있다. 단지 분노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자기를 이등시민으로 여기며 관심을 갖지 않은 이들에게 맞선다. 힘든 일이다. 범인을 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고 설명하고 범인을 체포하는 걸 보고 법정까지 가서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중후반부터 등장한 로버트가 자기 역할을 하고 그들에겐 약간의 보상이 따른다. 결말은 지나치게 편리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새 콜린스의 단편을 기다리고 있던 잡지의 독자들은 만족했을 것이다. 하긴 이미 험악한 세상을 사는 독자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 인터파크도서 북DB www.book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배경은 우주지만 주인공 내면에 집중해주세요 2020.11.04
“나도 추리소설 쓸 수 있어” 언니와의 내기가 탄생시킨 걸작 2020.10.21
댓글 주제와 무관한 댓글은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