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10.21 조회수 | 1,132

“나도 추리소설 쓸 수 있어” 언니와의 내기가 탄생시킨 걸작

1920년 10월 24일은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신인작가가 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 출판된 날이다. 그러니까 오는 10월 24일은 세계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추리작가와 그 작가가 창조한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를 만난 지 꼭 100년째 되는 날이다. 소설이 완성된 건 1916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작가들이 그렇듯,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퇴짜 맞는 통과 제의를 거쳐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까지 엄청난 순간인지 몰랐다. 잘 쓴 소설이라고 호평을 받았고 제법 팔렸지만 엄청 주목을 받은 건 아니기 때문에. 크리스티가 진짜로 유명해진 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출판되고 실종 사건이 있었던 1926년이었다. 그리고 전성기는 193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걸작들의 질주가 시작된다.

크리스티가 이 소설을 쓴 건 언니와 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기도 추리소설을 쓸 수 있다는 데에 내기를 걸었다는 걸 잊지 않은 크리스티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조제실에서 일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소설을 구상했다. 독살사건이었던 건 당시 직장 경험 때문에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탐정이 벨기에인이었던 건 크리스티의 교구에 벨기에인 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캐릭터를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은퇴한 경찰로 설정했는데, 그 탐정이 50년 넘게 활약할 거라는 걸 알았다면 나이를 그렇게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크리스티는 자신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작가로 활동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요약된 줄거리만 읽으면 솔직히 평범하다. 전쟁 때 부상당한 아서 헤이스팅스는 친구인 존 캐번디시의 초대를 받아 스타일스 저택을 방문한다. 캐번디시의 부유한 어머니는 얼마 전 앨프리드 잉글소프라는 젊은 남자와 재혼한 상태다. 며칠 뒤 잉글소프 부인은 스크리크닌 중독으로 사망하고 앨프리드 잉글소프는 아내를 살해한 범인으로 몰린다. 그리고 헤이스팅스의 친구이고 지금 잉글소프 부인의 도움을 받아 영국에서 살고 있는 벨기에인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사건에 뛰어든다.

잘 짜여진 영리한 소설이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크리스티는 독극물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지나치게 복잡한 트릭을 짰고, 이 정보를 막판까지 독자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지금 보면 아주 페어플레이는 아닌 것 같다. 서너 명 정도를 제외하면 용의자들은 개성이 흐릿하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로맨스 요소들은 그 때 기준으로 봐도 클리셰다. 크리스티는 원래 로맨스에 관심이 없었는데 당시엔 그런 이야기를 넣었고 시류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슷비슷한 분량과 내용의 로맨스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나온다. 더 잘 쓰이긴 했지만.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은 이미 여러 편의 크리스티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더 재미있어 할 작품이다. 일단 우리는 푸와로가 왜 엉뚱하게 영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는지 알게 된다. ‘뜻밖의 범인’을 만드는 크리스티의 여러 고정 트릭 중 하나가 여기서 선보인다. 그리고 그 트릭은 훨씬 유명한 몇몇 소설들에서 더 노련하게 변주된다. 크리스티식 시선 돌리기가 아직 덜 익은 상태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기도 하다. 몇몇은 굳이 넣을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몇 개만 상당히 영리하다. 푸와로는 이 소설에서 그 악명 높은 명탐정 강연을 선보인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아직 캐릭터 성격이 굳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소설의 푸와로는 증거를 시험관 안에 보관하거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은근히 과학 수사를 하는데, 이 낯선 광경도 역시 보는 재미가 있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은 스토리나 캐릭터, 주제와 같은 문학적 매력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비현실적이고 복잡한 퍼즐에 집중하는 추리소설의 황금기의 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장르의 문을 열려면 독자들이 그 작품의 차별성을 알아차리고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당시 사람들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의 독특한 가치를 그 즉시 발견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2천 부 정도 팔린 이 첫 작품을 쓴 작가가 이후 황금기 추리소설을 정의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성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작품을 시발점으로 볼뿐이다. 다행히도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은 앞으로 만개할 황금기 추리소설의 모든 재료와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발점으로서 아주 그럴싸하게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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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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