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9.29 조회수 | 1,663

나왔을 때부터 시대에 뒤떨어졌고, 그게 매력인 SF 소설

SF의 배경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변화한다. SF는 과학적 상상력을 펼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상상력을 담는 공간이기도 한데, 신화나 전설과는 달리, 이 공간은 과학적 지식이 쌓이면서 꾸준히 바뀔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천문학적 지식이 충분히 쌓이기 전에는 지구 바깥은 미지의 영토였다. 볼테르는 <미크로메가스>를 위해 시리우스와 토성인을 창조하면서 어떤 과학적 지식도 사용하지 않았다. 세상은 다양하고 지구 바깥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함이 존재하고 그 다양함 속에서 지구인은 하찮을 수도 있다는 기본 개념만 갖고 있었다. 많은 SF작가들은 그 정도의 철학적 기반도 없었다. 수많은 SF는 지구 바깥의 세계를 기존의 신화적 상상력을 이주시키는 용도로 사용한다: 이미 우리는 지구의 거의 모든 영역을 탐사했으니 신과 괴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뛰어놀려면 지구 바깥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 신화적 동물원으로서의 공간은 점점 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일단 우린 태양계의 행성들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게 되었다. 기존의 화성인이나 금성인들은 퇴장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태양계 주변 다른 행성계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전 SF에서는 그 동네에 고향 행성을 두고 있던 외계인들도 슬슬 짐을 쌀 준비를 해야 한다. 우주와 생물학에 대한 지식과 고민이 쌓이면서 우리와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과학지식을 가진 존재들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 이 속도라면 ‘스타트렉’이 SF가 아닌 판타지로 여겨질 날도 머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아바타’는 어떻게 되려나? 배경이 되는 알파 켄타우루스 행성계가 그 영화에서 그린 것과 전혀 다르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는데?

사실 이런 변화는 옛 SF를 감상하는 데에 그리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대놓고 풍자적인 코미디를 쓰거나 ‘매트릭스’ 수준의 음모론을 짜는 게 아니라면 더 이상 구식 화성인과 운하를 등장시키는 새 소설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쓰인 소설들이 매력을 잃는 건 아니다. 잘 쓰인 작품이라면 그 작품은 옛 신화가 그렇듯 고풍스러운 매력을 간직한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도 그런 고풍스러운 신화적 화성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언젠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시대에 뒤떨어졌는가?’란 제목의 기사와 마주친 적 있는데 좀 당황스럽다. 이 책은 나왔을 때부터 시대에 뒤떨어졌었고 그게 매력이었다. 오류로 판명된 옛 과학과 신화적 상상력이 브래드버리 특유의 시적 상상력과 결합되어 오래된 이야기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 결과물.

장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작가 자신도 인정하듯 진짜로 장편은 아니다. 브래드버리가 당시 썼던 수많은 화성 소재 단편들을 모아 일종의 미래사를 구성한 책이다. 처음부터 장편을 의도한 책이 아니라 이어서 보면 좀 덜컹거린다. 브래드버리는 작품을 꾸준히 수정하고 개정판을 내는 것으로 유명한데 <화성연대기>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에 나온 새 번역본은 그 중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이게 가장 좋은 버전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난 옛 SF를 고쳐쓰면서 연대를 뒤로 미루는 건 좀 별로다. 어차피 세월이 흐르면 다 과거가 될 것을.

지금 다시 읽으면 옛날에 느꼈던 고풍스러움과 지금 느껴지는 고풍스러움이 또 다르다. 예를 들어 이 책은 미국 서부개척사의 비유로 읽힐 수 있는데, 원주민 학살과 문화 파괴에 대한 백인 작가의 죄의식은 여전하지만 여전히 서부극이 인기를 끌었던 시절의 독자들과 지금의 독자들은 다른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전히 지구 멸망을 두려워하지만 핵전쟁에 대한 냉전시대에 대한 공포는 과거가 되었다. 계속 우리는 새로 쌓이는 역사를 체험하며 50년대 미국 작가가 만든 오래된 과거에 이를 투영하는 중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과정 중 <화성 연대기>는 아직까지 그 고풍스러운 매력을 잃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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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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