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9.23 조회수 | 1,630

기숙학교 이야기의 원형 중 하나랄 수 있는 작품

크리스타 빈슬로의 <제복의 소녀>가 얼마 전에 민음사에서 번역되었다. 지금까지는 '제복의 처녀'라는 제목으로 불렸던 책이다. <작은 아씨들>, <비밀의 화원>처럼 박제된 옛 제목이었는데, 제대로 된 첫 번역서가 이렇게 개정된 제목을 쓴다면 고마워하며 따를 수밖에. 아, 이것도 원제는 아니다. 소설 제목은 '소녀 마누엘라'다. 하지만 연극, 영화, 소설을 거치면서 꾸준히 새 제목을 달았던 작품이고 'Mädchen in Uniform'이라는 영화 제목이 가장 유명하니, 이 제목의 선택은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혀끝에 붙은 '제복의 처녀'라는 옛 제목의 버릇이 쉽게 떨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전에도 번역본이 있었다. 지금도 '제복의 처녀'로 검색하면 ‘크리스티나 윈스뢰’가 쓰고 왕수영이 번역한, 청목사 출판 그린북스 038번 책이 나온다.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이 책인데(커버는 그 동안 또 바뀌었다), 원래는 청자각에서 더 이전에 나왔던 레먼문고 10번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로미 슈나이더가 나왔던 두 번째 '제복의 처녀'의 흑백 스틸 사진들이 책 앞에 실려 있었다.

하여간 레먼문고/그린북스 버전 '제복의 처녀'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좋은 번역이어서가 아니다. 일본어에서 직역한 티가 팍팍 나고 문장도 엄청 낡았다. 저자인 왕수영은 1937년에 태어나 지금 일본에서 거주하는 (생존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대신 일본에서 북송선을 취재했다가 조총련 관련자로 몰려 남산에 끌려갔고 그 뒤로 고국을 떠났다는 정보를 찾았다) 소설가인데, 정말 일제 시대를 겪은 나이의 사람이라는 티가 난다. 예를 들어 나는 여자학교 내의 (유사) 동성애 상대를 가리키는 S라는 은어를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무슨 뜻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왕수영 선생은 우리도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며 주석 같은 건 안 달아주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적인 연구 대상이다. 고맙게도 새 번역은 이런 언어학적 연구가 필요없다.

성장소설이다. 주인공 마누엘라(렐라) 폰 마인하르디스는 가난한 장교의 딸이다. 시대배경은 아직도 사람들이 보불전쟁을 기억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이다. (역시 장교의 딸이었던 빈슬로는 1888년생이다.)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독일 장교 가족의 섬세한 일상 묘사가 이어지고. 우리는 그 동안 마누엘라가 연상의 여자들에게 집착하는 타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슷한 나이의 남자아이를 만나도 그 남자애의 엄마에게 시선이 먼저 가는 아이다.

어머니가 죽고 무책임한 아버지는 딸을 기숙학교로 보낸다. 빈슬로 역시 어머니 사후 황후 아우구스타 기숙학교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이 정도면 소설에 나오는 묘사의 정확성을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이 학교에는 전교학생을 매혹시킨 폰 베른부르크 선생이라는 아이돌 대스타가 있고 마누엘라는 사랑에 빠진다. 마누엘라는 학교 연극 '자이르'에서 기사 네르스탕 역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는데, 그만 그후 이야기가 최악의 방향으로 꼬이게 된다.

이후 나온 기숙학교 이야기의 원형, 적어도 원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과 올리비아(도로시 스트래치)의 '올리비아', 비올레트 르뒥의 '테레즈와 이자벨'을 읽는다면 유럽 배경 여자 기숙사 동성애 이야기를 쓰는 데에 필요한 필수적인 조합은 대충 얻을 수 있다. 세 작품 모두 각자의 개성과 특징이 있다. '제복의 소녀'는 그 중 가장 가혹한 환경을 배경으로 한다. 십대시절을 군인과 귀족의 아내를 훈련시키는 군국주의 사관학교와 같은 곳에서 보낸 작가의 원한이 녹아 있다.

소설과 두 편의 영화는 두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영화는 모두 마누엘라가 기숙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하지만, 소설은 중반에야 학교가 나온다. 빈슬로는 소설의 전반부를 통해 마누엘라의 욕망과 감정이 일시적인 잠시의 열광이 아니라고, 원래부터 그런 욕망을 품은 그런 아이였다고 꼼꼼하게 설명하려 하는 것 같다. 두 번째 차이점은 결말이다. 소설은 비극이지만 영화는 어느 정도 희망이 있는 해피엔딩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결말을 따르고 싶다. 십대여자아이에게 꿈도 희망도 주지 않고 인생을 끊어버리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 게다가 마누엘라의 모델인 빈슬로는 학교 졸업 이후 힘들지만 알차고 흥분되는 일생을 살았다. 영화 속 마누엘라도 그와 비슷하지만 더 운 좋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꿈꿔보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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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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