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9.16 조회수 | 917

금성에 생명체가 산다? 금성이 나오는 SF 소설

며칠 전 영국 카디프 대학 제인 그리브스 교수 국제 연구팀은 금성 대기 구름에서 인의 수소화합물인 포스핀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지구에서 포스핀은 혐기성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배출된다. 아직 금성에 생명체가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암시하는 단서가 발견된 것이다.

토론은 과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오늘은 금성이 나오는 SF 소설을 다루어보기로 하자. 번역된 책으로 뭐가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온 여름을 이 하루에’다. 하염없이 비가 내리지만 7년에 한 번 태양이 딱 한 시간 고개를 내밀고 금성의 숲은 그 때를 맞아 출렁거리고 아이들은... 무척 시적이고 아름답고 브래드버리의 다른 단편들이 그렇듯 환상적으로 비과학적이다.

그밖에 뭐가 있지? 제임스 S. A. 코리의 ‘익스팬스’ 시리즈 2편 <칼리반의 전쟁>에서 금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편에 나왔던 프로토분자가 금성에 떨어져 진화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라디오극 ‘베가 호의 탐험’에서 금성은 유배된 죄수들이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버티는 지옥 같은 곳이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3세기에 걸친 냉전을 끝내고 전면전에 돌입하려는 상황에서 자유진영은 이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화성만큼 많지는 않다. 화성과는 달리 금성은 두터운 구름층 때문에 관측이 어려웠고 운하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치도 없었다. 그래도 운하가 있는 옛 화성에 대응되는 이미지는 있었다.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이 지적했듯, 이 역시 과학적 논거는 부족했다. 태양에 가까우니 덥겠지. 구름이 있으니 습기차겠지. 그렇다면 습지도 있고 정글도 있고 공룡들도 돌아다니지 않을까. 이 옛 금성의 이미지는 1960-1970년대에 소련과 미국이 탐사선을 보내면서 조금씩 허물어졌다.

오늘 다룰 한낙원의 <금성 탐험대>는 옛 금성을 무대로 한다. 이 장편소설이 ‘학원’에서 연재된 건 1962년부터 1964년 사이. 지구에서 꾸준히 금성에 탐사선을 쏘아올리고 있긴 했지만 아직 쓸만한 정보를 얻기 전이다. 그러니까 정직하게 옛 금성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시기의 끝무렵에 쓰인 작품이다.

시대배경은 1981년. 냉전이 한창이다. 하와이에 우주 항공 학교가 세워지고 고진이라는 부산 중학 출신 남자와 최미옥이라는 서울 출신 여자가 4년의 공부를 마치고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기껏해야 십대 후반이고 동갑이다. 그런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라.

“같은 우주선을 타야겠는데—“
“그렇게 안 될라구요. 여태 같은 짝으로 훈련을 받아왔는데요.”
“다른 나라 친구들도 모두 미스 최와 같이 타겠다는걸.”
“호호...... 고맙지 뭐예요. 그렇지만 난 고진 씨 우주선을 탈 테니 걱정 말아요.”

신성일과 엄앵란의 성우였던 이창환과 고은정 목소리가 자동음성지원된다. 덤으로 말하면 고진은 우주식을 먹다가 ‘여자의 손으로 된 따스한 음식’이 그립다고 징징거리는 놈이다.

미국에서는 금성에 보낼 첫 유인우주선을 준비하고 있고 두 사람은 모두 부조종사와 통신사로 탑승할 예정이다. 발사 하루 전 고진은 정체불명의 악당들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알고 봤더니 범인은 미국 우주선의 선장인 스미스 중령. 본명은 니콜라이 중령으로 (어쩜 이름을 이렇게 대충 지었나) 소련 스파이다. 고진은 강제로 소련 우주선에 탑승한다. 소설은 소련에서 왜 굳이 고진을 원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데, 그 때문에 니콜라이 중령은 고진에게 집착하는 동성애자처럼 보인다. 아니, 보인다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

두 우주선은 경쟁하며 금성으로 날아간다. 중간에 이들은 정체불명의 소행성을 만나 착륙한다. 그 소행성은 헬기가 뜰 정도로 대기가 농밀하다. 이 정도면 과학자들이 존재를 모를 수가 없는데, 소설에서는 그냥 넘긴다. 이건 당시 SF의 어법과 관계 있다. 옛 SF 작가들은 비행 중간에 낯선 천체를 발견하는 것, 그곳에 착륙한 뒤에야 거기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를 얻기 시작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옛날 지구의 탐험가들이 그랬으니까.

소행성을 떠난 이들은 모두 금성에 착륙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곳은 옛 금성이다. 대기는 지구인들에게 유독하지만 거대한 용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이 산다. 양측 우주선 선원들은 유독한 금성의 대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신나는 (하지만 당사자에겐 죽을 맛인) 모험을 벌인다. 아까 만난 소행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과학은 융통성 있게 사용된다. 옛 금성인 건 그렇다고 쳐도 금성의 하루가 왜 이리 짧은 것인가.

당연히 낡았다. 과학은 옛 것이고 그걸 고려한다고 해도 많이 대충이다. 소설에 나오는 두 여성 캐릭터는 모두 씩씩한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적인 묘사는 툭툭 튀어나온다. 냉전시대의 편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고. 무엇보다 한국어 텍스트의 언어는 동시대 영어권 언어보다 훨씬 빨리 늙는다. 대중소설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씩씩하고 진취적이고 의외로 개방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1960년대 초라면 박정희 정권 때이고 아직 대부분 국민이 자유롭게 해외여행도 못했으며 다른 나라 사람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도 모르던 때다. 이런 시기에 한낙원은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당당하게 경쟁하며 우주로 진출한 미래를 꿈꾸었던 것이다. 여전히 냉전 마인드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소련 사람들의 묘사도 의외로 다채롭다. 소설은 일방적인 우리 편의 승리 대신 대화와 이해와 평화를 추구한다.

한국 SF는 계보가 없는 문학이라고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활동하는 한국어권 SF 작가 중 한낙원과 같은 옛 한국작가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이어진 수많은 작가들의 노력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가 그 동안 쌓아온 SF 상상력의 역사를 들여다 볼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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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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