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9.09 조회수 | 2,139

당신이 오늘밤 악몽을 꾼다면 이 책 때문이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가 최근에 번역되었다. 이 우루과이 작가의 작품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지만 ‘깃털 베개’와 ‘목 잘린 닭’만은 라틴 아메리카 단편 앤솔로지나 호러 단편 앤솔로지에 꾸준히 수록되었었다. 이 두 작품 모두 이 단편집에 실려있다.

‘깃털 베개’는 유명한 이야기다. 젊은 여자가 냉정한 남자와 결혼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한다. 아내는 의사들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 착란을 일으키며 죽어간다. 죽은 뒤에야 남편은 아내의 사인을 알게 된다. 이는 굉장히 오싹한 뱀파이어 이야기이고 그와 동시에 고딕 버전 ‘위기탈출 넘버원’이기도 하다. 아주 인간적인 로맨스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내용이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사연 따위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자연의 난폭한 힘에 의해 중단된다.

‘깃털 베개’ 다음으로 유명한 ‘목 잘린 닭’도 불행한 커플의 이야기다. 이들은 네 명의 아들들을 낳았는데 모두 병을 앓고 백치가 된다. 마지막에 태어난 딸은 다행히도 정상이다. 하지만 키로가는 이들에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을 제공한다. 여러분이 이 단편집을 읽고 악몽을 꾼다면 십중팔구 이 작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두운 작품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처음 피운 담배’는 심술궂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한 악동담이다.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제목만 보면 고딕 호러 소설 같지만 영리하게 짜여진 재미있는 러브 스토리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뇌막염 증상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된 여자의 침대 곁을 지키게 된다. 여자는 회복되지만 병을 앓았을 때만 있었던 것 같은 그 감정은 얼마나 진짜일까? 그 외에도 몇 편 더 있는데, 상대적으로 밝은 결말이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이 단편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은 어둡거나 우울하거나 끔찍하거나 악랄하다.

이 정도면 ‘작가의 성격이 참 안 좋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오라시오 키로가라는 남자의 일생을 훑어보면 이해가 된다.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두 달 되던 무렵, 아버지가 오발 사고로 가족 앞에서 목숨을 잃는다. 어머니는 재혼하지만 의붓아버지는 엽총으로 자살하고, 키로가는 또 그걸 목격한다. 친한 친구 페데리코 페란도가 결투에 휘말리자 증인 자격으로 나서는데, 페란도는 키로가의 눈 앞에서 오발 사고로 죽는다. 누나와 형이 장티푸스로 연달아 죽는다. 아내가 음독자살한다. 후원자였던 우루과이 대통령 발타사르 브룸 대통령이 쿠데타에 항거하기 위해 자살한다. 그러다가 위암 판정을 받은 우리의 주인공은 청산가리를 먹고 죽는다.

이 정도면 어처구니 없음이 지나쳐 좀 농담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도 농담 같았을 리는 없지 않은가. 이런 사람이 성격 안 좋은 티가 팍팍 나는 글을 썼다고 뭐랄 수는 없다. 키로가는 그냥이 자신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세계를 정직하게 기술했을 뿐이다.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자연은 잔인하고, 죽음은 언제나 우리를 노리고 있다. 특히 여러분이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의 무시무시한 자연과 마주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벌레를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라틴 아메리카 버전 ‘위기탈출 넘버원’의 주인공이 될 테니.

‘깃털 베개’와 ‘목 없는 닭’만 읽었을 때는 몰랐던 것. 키로가는 동물 이야기를 굉장히 잘 쓴다. ‘일사병’, ‘가시철조망’, ‘야구아이’는 모두 개, 소, 말과 같은 인간 주변의 동물들이 주인공인데, 의인화되었을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좋다. 오히려 인간 주인공들보다 더 공감이 쉬워서 이 컴컴한 단편집에 갇혀 있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조사해보니 키로가는 두 아이들을 위해 (아내가 음독자살한 직후이다) ‘밀림 이야기’라는 동화책을 썼고 이 책은 2010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졌다. 밑은 예고편이다. 픽사와 같은 퀄리티는 기대하지 마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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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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