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9.02 조회수 | 1,510

“왜 경찰에 신고를 안 해?”라고 물으신다면

장파트리크 망셰트의 <웨스트코스트 블루스>라는 책이 있다는 건 <죽이는 책>에 실린 제임스 샐리스의 소개글을 읽고 알았다. (그 책에서 번역제는 그냥 ‘서부 해안의 블루스’였다.) 이번 번역본을 펼쳐드니 역시 샐리스의 서문이 실려있다. 최애 작가에게 이런 식으로 꾸준히 묻어가는 것도 좋은 일인 것 같다.

운 없어서 개고생을 하지만 자업자득인 남자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나쁜 일을 했거나 시민으로서 책임을 회피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주인공 조르주 제르포가 한 일은 차를 타고 가다가 부상당한 남자를 만나 병원까지 데려다 준 게 전부다. 병원 수속이 귀찮아서 그냥 내빼긴 했다. 그러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라 밀어붙일 수는 없다.

어설프게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굴고 며칠 뒤, 제르포는 두 킬러의 습격을 받는다. 첫 번째 시도는 완전히 무방비상태였지만 운 좋게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시도 때엔 제르포도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훨씬 안 좋게 끝난다. 그 순간 조르주 제르포라는 남자는 프랑스의 법치 시스템에서 벗어나버린다.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남자는 왜 경찰에 신고를 안 하지? 원래 수많은 범죄소설이 시치미 뚝 떼고 엉덩이로 뭉개는 질문인데, 이 소설에서는 정말로 튀어서 작가도 중간에 한 번 언급한다. 영문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남자가 너를 죽이려 하는데 너는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깡촌에 숨어있는 거니? 대단한 훈련도 받은 적 없는 회사 임원인 주제에 왜 직접 복수하려는 거야?

망셰트가 제르포를 통해 던진 표면적인 답은 “나도 몰라”이다. 그것도 충분히 좋은 답이다. 원래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제르포는 소설 내내 자기 행동의 비논리성에 당황하고, 그 혼란스러움이 소설의 일부를 이룬다.

다른 답안은 처음부터 제르포가 사는 세계가 그렇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1960년대 프랑스가 사법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 문명국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젊었을 때 좌파 운동가였던 제르포는 알제리 전쟁 전후로 프랑스 사법체제가 얼마나 야만적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겐 그 당시가 얼마나 전쟁처럼 느껴졌다는 걸 알고 있다. 이 경험과 지식이 제르포에게 ‘경찰은 믿을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답도 생각난다. 해밋의 <몰타의 매>에 나오는 플릿크래프트 일화 말이다. 지나가던 길에 갑자기 철제 빔이 떨어져 죽을 뻔했던 남자가 갑자기 가족을 떠나 새 도시에서 새 신분으로 정착했는데,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 제르포도 플릿크래프트와 같은 입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암살 시도라는 철제 빔이 떨어지자 다른 종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단지 플릿크래프트와는 달리 제르포는 계속 철제 빔이 언제 떨어질 지 알 수 없는 몇 개월을 보냈던 것뿐이다.

어느 쪽이건 <웨스트코스트 블루스>는 굉장히 남성중심적인 이야기다. 이 소설에 나오는 두 여자들은 일종의 환경으로만 존재한다. 제르포의 상황은 1960년대 프랑스 남자들의 실존적 위기를 반영한다. 그게 폭력적인 장르소설의 형태로 터져나온 것인데, 이게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20세기 후반에 나온 수많은 실존주의 소설들이 장르적 폭력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가.

프랑스 장르소설 대부분이 그렇듯 그리 긴 편은 아니고 전개도 빨라 한숨에 읽을 수 있다. 스토리 자체는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 재료 수입상에서 사와 포장만 뜯은 것처럼 전형적이지만 이 익숙한 재료들을 엮는 방식은 상당히 재미있다.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뒤섞고 평범한 문장 뒤에 갑작스러운 폭력을 터트리는 스타일 같은 것 말이다. 제르포, 살인청부업자, 그 주변 인물들 역시 전형적인 것 같으면서도 미국 소설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20세기 유럽의 개성이 녹아 있어서 차별적인 매력이 있다. 빨리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 수많은 문화적 레퍼런스가 등장하는데, 그 중 제르포가 듣는 음악들은 책을 읽는 동안 들으면 효과가 상당하다. 작가가 직접 선곡한 OST인 셈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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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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