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8.26 조회수 | 1,212

위험한 삶에서 갈구한 현실도피적 오락

오늘 소개할 책은 굉장히 재미없는 제목을 갖고 있다. <고전 추리, 범죄소설 100선>. 원제는 'The Story of Classical Crime in 100 Books'로 역시 아주 개성적인 제목은 아니지만 작가의 의도가 보다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작가인 마틴 에드워즈의 목표는 ‘고전 범죄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단지 에드워즈가 고른 ‘고전 범죄소설’의 영역은 다른 책보다 편협하다. 에드워즈가 주로 다루는 작품들은 20세기 전반, 그러니까 소위 ‘황금기’로 불리는 시기의 영국소설들이다. 아무래도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몇 편의 미국소설과 비영어권소설들을 소개하긴 하는데, 이러다 보니 오히려 약간 모양이 이상해진 구석이 있다. 사실 100선이라는 제목과도 안 맞는다. 이 책이 소개하는 소설은 102편이다. 모양이 이상해지긴 했지만 나는 이런 어긋남이 오히려 장르를 다루는 책에 어울리는 것 같다. 장르는 원래 틀 안에 완벽하게 가두기가 어렵다.

이 ‘편협함’은 당연히 장점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나에게 ‘추리소설’이란 명탐정이 나와 복잡한 미스터리를 푸는 20세기 초반의 범죄소설이니까. 당연히 (또는 어쩔 수 없이) 동시대 소설도 읽지만 내 뿌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아직 내가 읽지 않은 이 부류의 소설을 찾고 있다. 나 같은 독자들에게 에드워즈의 이 책은 보물지도다.

서문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에드워즈의 책은 ‘걸작선’과는 거리가 좀 멀고, 작가의 취향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20세기 전반 영국이라는 특별한 시기를 거치면서 이 장르가 어떤 종류의 소설들을 생산해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랄까.

1902년작인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가의 사냥개>에서 시작되어 1950년작인 줄리안 시먼스의 <2월 31일>로 끝나는 리스트이니, 연대기적인 순서와 아주 무관한 리스트는 아니지만, 에드워즈의 책은 역사적인 순서보다 다루는 작품들의 성격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첫 두 챕터인 '새 시대의 여명'과 '황금기의 도래'를 통해 다루는 시대를 설명한 뒤로는 주로 테마별로 작품들을 묶는다. 명탐정, 대저택, 법정, 연쇄살인, 불가능 살인사건, 정치, 코미디, 학교, 도서추리, 저자 유일의 추리소설. 기타등등.

비슷한 부류의 다른 책과 에드워즈의 책이 다른 점은 특정 시공간에 집중하다보니 이 소설들을 낳은 세계의 성격이 보다 잘 보인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다보니 사람들은 지금까지 체험하지 못한 보다 복잡하고 위험한 삶을 살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현실도피적인 오락을 갈구하게 된다. 이 분야의 소설을 쓴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적이거나 비정치적인 중상층 엘리트들이라 이들의 도피적인 작품들이 다루는 소재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시대의 흐름이 보인다. 이 책을 읽고 영국 시골이 배경인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으면 느낌이 다를 것 같다. 사건이 벌어지는 목사관과 은퇴한 군인의 저택 주변을 떠도는 실직자들이 상상될 테니까. 개별 작품들이 어떤 맥락 속에서 탄생했는지 보다 상세한 정보를 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의 백지 상태에서 접해 온 고전 추리소설들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읽다 보면 두 이름과 꾸준히 마주친다. 도로시 세이어즈와 줄리안 시먼스. 이들의 작품들이 각각 한두 편 정도 소개되지만, 이들은 주로 장르 비평가로 호명된다. 특히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는 꾸준히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에드워즈는 시먼스의 대척점에 서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의견이 다르고 시먼스가 보지 못했던 빈 구멍을 채워준다. 시먼스가 낮게 평가한 작가의 좋은 작품들을 추천하고, 황금시대의 추리작가들은 대부분 보수주의자라는 주장에 맞서는 진보적인 작가들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에드워즈는 퍼즐 위주의 추리소설이 범죄소설로 진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시먼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에드워즈의 의견 쪽에 기운다. 정통 추리물은 과도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고유의 가치를 가진 영역이고 이들은 언제든지 생명력 있는 작품을 낳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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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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