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8.19 조회수 | 1,045

전직 중장비 기사가 쓴 살인 불도저 이야기

코로나바이러스가 판을 치는 우울한 세상이지만 올해도 언제나처럼 휴고상 시상식이 있었고, 그 며칠 전에 휴고상이 없었던 시대의 작품들에게 상을 주는 레트로 휴고 시상식이 있었다. 올해는 1945년에 발표된 SF 작품들이 대상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의 의견과 취향이 반영된 일반 휴고상과는 달리, 레트로 휴고는 수십 년 뒤 사람들의 의견과 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상을 받는 작품의 성격에 오묘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그냥 휴고와는 별 인연이 없었던 레이 브래드버리, 여성작가인 리 브라켓과 같은 작가들에게 상이 돌아가는 식이다. 올해 시리즈 상은 크툴루 신화의 창작자들에게 돌아갔는데, 이 역시 이전 휴고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결과다. 지금도 논란은 있다. 크툴루 신화의 성공과는 별도로 이 시리즈의 창시자인 H.P. 러브크래프트는 인종주의와 성차별로 악명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올해, 그러니까 1945년 레트로 휴고에서 중편상, 그러니까 ‘Best Novella’ 상을 받은 작품은 시어도어 스터전의 ‘킬도저!’였다. 소개하기 참 좋은 타이밍이다. 현대문학에서 얼마 전에 묵직한 스터전 단편집을 냈기 때문이다.

‘킬도저!’는 제목만으로 내용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한 작품이다. 사람을 죽이는 불도저가 나온다. 이 소설에서는 데이지 에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D-7 불도저는 어쩌다가 사람을 죽이기 되었을까? 굳이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프롤로그에 설명이 나온다. 지구엔 이전에 기계문명을 이룩한 고대 존재가 살았다. 그런데 외계에서 온 구름 형태의 침입자가 그들의 기계 속에 깃들었고 전쟁이 일어났다. 두 종족 모두 멸망했지만 침입자 하나가 레이야히헤도 제도의 섬에 살아남았다. 그곳 원주민들은 그 주변에 신전을 지었지만 그들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20세기가 되어 한 무리의 남자들이 활주로를 짓기 위해 섬을 찾아온다. 이들은 신전을 발굴하고, 거기서 뛰쳐나온 외계 종족은 데이지 에타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학살이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도입부가 이 이야기를 SF로 만들어주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말이 되지는 않고, 이 도입부가 없어도 진행엔 아무 무리가 없다. 다시 말해 SF가 아니어도 여전히 작동가능한 호러물이라는 뜻이다. 후배 작가인 스티븐 킹은 ‘트럭’이라는 단편(나중에 스티븐 킹 자신이 감독한 ‘맥시멈 오버드라이브’의 원작이 되었다)과 <크리스틴>이라는 장편에서 의식을 갖게 된 차들을 다루었는데, 이들도 ‘킬도저!’와 큰 장르 차이가 없다. 모든 것에 컴퓨터가 달려있는 요새는 이를 소재로 조금 더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지만 20세기는 다른 시대였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D-7 불도저에 대한 꼼꼼한 묘사에 있다. 스터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부터 1943년 사이에 자메이카와 푸에르토리코의 미군 기지와 비행장 건설 현장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했는데, 현장을 아는 당사자의 지식과 경험이 정교하게 반영되어 있다. 너무 정교해서 종종 따라잡기가 힘들 때도 있는데, 옛 범선이 나오는 해양소설이 그런 것처럼 이 디테일을 놓치면 소설의 재미도 잃어버린다. 다행이지만 D-7 불도저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이 전적으로 불도저에 종속되어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스터전이 살인 불도저를 환상적으로 그린다고 해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인간이다. 불도저의 살인이 이어지는 동안 이들이 갖고 있던 인종차별, 비겁함, 종교적 광기가 하나씩 폭로된다. 그렇다고 지옥도일 것은 없는 것이, 이에 맞서는 용감함, 포용성, 창의성도 같은 속도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1974년에 TV 영화로 만들어졌고 스터전 자신도 참여했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좋은 작품은 아니고 스터전도 결과물에 실망했다고 한다. 원작의 인종차별적 긴장감, 종교적 광기가 사라졌고, 무엇보다 데이지 에타의 매력이 소설보다 훨씬 약하다. 앞에서 ‘좀 따라잡기 어렵네. 영화로 만들어진 걸 보면 좀 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들이 정작 화면 위에 재현되니 다 밋밋해져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영화적으로 보이는 소재를 다룬 작품처럼 보여도, 결국 쉽게 옮길 수 없는 언어 매체만의 매력이 따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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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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