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7.08 조회수 | 2,216

인간이 육신 없이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세상이 온다면?

<종이 동물원>으로 인기를 끌었던 켄 리우의 새 단편집이 나왔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재미있게도 이 책은 ‘한국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미국에서 묶이지 않은 단편들을 역자인 장성주가 직접 모아 만든 작품집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올해 2월에 켄 리우의 두 번째 단편집이 나왔는데, 이 책도 번역이 나올 지 모르겠다.

‘모든 맛을 한 그릇에―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처럼 중국인의 미국 이주사를 다룬 작품도 있지만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단편들은 기술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변해가는 인간들의 삶을 다룬다.

그 중 ‘싱귤래리티 삼부작’으로 엮인 단편 셋을 소개한다. 연결되는 스토리나 캐릭터는 없지만, 하나의 미래사를 공유하는 작품들이다.

‘카르타고의 장미’는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도입부는 죽은 동생 리즈를 회상하는 나이 든 여자의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다보면 화자가 회상하는 리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자인 리즈는 육신에 갇힌 인간의 존재에 조금씩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정신을 스캔해 복사본을 만드는 실험에 참여한다. 이 스캔은 살아있는 뇌만 가능하고 그 과정 중 원래의 뇌는 파괴된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카르타고의 장미’에서 미완의 상태로 끝났던 기술이 이미 보편화된 시대를 다룬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세계를 떠나 자신의 정신을 업로드시킨다. 앞에서 말했듯 스캔 과정 중 뇌가 파괴되기 때문에 이들은 실질적으로 디지털화된 유령이다. 이야기의 화자는 업로드를 포기하고 현실 세계에 남은 사람이다. 디지털 ‘망자’들의 유혹을 거부하고 평범한 삶을 고집하지만 인간들의 사회는 점점 파괴되고 소멸되어 간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인 삶을 고집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건 아무런 발전이나 변화없이 옛날의 삶을 거칠게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 삶을 다음 세대에도 권장할 수 있을까?

삼부작의 마지막 편인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서 인류는 싱귤래리티의 작업을 완료했다. 이들은 이제 디지털 우주 속의 수학적 환상과 같은 곳에서 엄청난 사고 속도로 살고 있다. 화자의 엄마는 남극기지의 돔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빠른 속도로 살던 과학자로, 이제 우주 여행을 준비 중이다. 다른 태양계로 우주선을 보내 그곳의 로봇에게 정신을 전송하는 것이다. 원본을 보존한 채로 의식의 양자 연산을 복제하는 일은 아직까지는 불가능하고 의식을 재전송할만큼 강력한 송신장치를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엄마는 돌아올 수 없다. 탐험의 숙명이라는 익숙한 테마가 등장하고 탐사의 방향이 다시 물질세계로 향한다. 화자와 엄마는 잠시 현실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인류가 떠난 뒤로 복구된 자연의 아름다운 묘사가 이어진다.

아름답고 인상적인 단편들인데, 좀 갇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건 작가가 어쩔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육신을 버리는 과정은 지금까지 몇 천 년 동안 인간들이 당연시했던 스토리의 재료를 버리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편에서 인류는 데이터 센터의 수학적 천국 안에서도 인간 삶을 어느 정도 모방한 삶을 살고 있지만 아마 이 단계도 곧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우리 세계 이야기꾼의 영역 바깥이다. 바로 그 근본적인 변화가 강한 종교적인 감흥을 주기도 하지만.

싱귤래리티 삼부작처럼 묵시론적인 작품만 있는 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맛을 한 그릇에―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는 아이다호에 온 중국인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들의 이야기는 중국 이주민 역사 상당부분을 압축한다. 그리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켄 리우는 이 이야기를 <삼국지>와 섞어버린다. ‘매듭 묶기’는 매듭 문자를 사용하는 마을 사람들과 현대 미국 문명의 충돌을 담담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많이들 켄 리우를 테드 창과 비교하는데 ‘사랑의 알고리즘’이 철학적 아이디어를 다루는 방식은 작가도 직접 인정하듯 매우 테드 창답다. 이런 식으로 한 작가의 개성은 다른 작가에게도 도구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장르 세계에서는.

아, 참. 영화팬들에게 재미있을 정보 하나. 고레에다 히로가즈 감독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촬영 중이던 SF 영화를 기억하시는지? 그 영화의 원작이 이 책 마지막에 실린 ‘내 어머니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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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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