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7.01 조회수 | 2,192

순정만화가 한국 SF에 끼친 영향에 관하여

10여 년 전에 인터넷에서 아무개 씨와 나누었던 대화가 갑자기 떠오른다. 기억을 살려 그 일부를 복원해본다.

나 : 그러니까 1999년이 지나자 종말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사실은 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1999년 이전에 쓰면 좀 이상할 것 같았지요. 그건 1999년 종말론을 믿는다는 말이잖아요. 하지만 당시 한국 SF에서는 많이들 1999년 종말론을 소재로 삼았어요. 다들 정말 진지하게 믿었다기보다는 안 넣으면 섭섭해서 그랬다고 할까...

아무개 씨 : 당시 한국 SF요?

나 : 네, 당시 한국어권에서 주류 SF는 <1999년생>, <별빛 속에> 같은 순정만화였거든요. 아, <라비헴 폴리스>도 있다. 미래 도시가 배경이긴 한데,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가 1999년 종말 이전 사람의 상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 뒤에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SF, 그러니까 사이언스 픽션의 정확한 역어가 과학소설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꽤 길게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픽션 모두가 소설은 아니다. SF는 소설로 시작했지만 영화, 만화, 연극, 텔레비전과 라디오 드라마 그리고 아직 우리가 아직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의 매체를 포함한다. SF의 역사를 제대로 다루려면 우린 이 모든 매체를 커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심각한 구멍이 생긴다. '스타워즈'와 '스타트렉'이 없는 SF 역사는 불완전할 것이다. 그리고 로봇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카렐 차페크의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은 희곡이었다.

전혜진의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는 1987년부터 2020년에 이르는 순정만화 중 SF 장르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들어가는 말의 제목은 '나의 오랜 억울함에 대하여'라고 붙어 있는데, 한국 순정만화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감정은 어느 정도 디폴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SF 장르에 속한 창작자라면 그 감정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 SF 장르를 이야기할 때 순정만화를 언급하지 않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다. 그냥 시도만 드문드문했던 것에 아니라,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던 수많은 작품들이 있었고 이들이 굵직한 흐름을 형성했다. 당시 그건 생명력 있으며 주도적인 장르 세계였다. 그리고 내가 앞에서 말했듯 1990년대 전후에는 한국어 SF 장르의 주류였다.

그들이 이후 SF 장르 작품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고 전통이 갑자기 끊어졌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나는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내 초기작은 당시 ‘순정만화’ 같다는 말을 들었다. 연애 이야기 같은 건 안 나오는데 그랬다. 생각해보면 당시 독자들은 ‘순정만화’를 무의식적으로 선입견보다 넓은 틀에 넣어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순정만화가 이후 SF 텔레비전 드라마에 끼친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하드해 보이지 않을 뿐이지, 한국 드라마에서 SF의 비중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궁'과 '별에서 온 그대'는 존 클루트 일당의 'SF 백과사전(http://www.sf-encyclopedia.com)'에서 언급되는 몇 안 되는 한국어 SF 작품 중 하나다. (안다. 개선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궁'의 원작은 대체역사를 다룬 순정만화였다.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는 이 당연하게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장르 비평가들의 시야에서 계속 벗어나 있던 세계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한 입문서이기도 하지만 이 이중으로 무시된 ‘SF 만화’의 계보를 복구하려는 시도이다.

만화에 대한 책이지만 그림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래도 만화보다는 SF에, 그림보다는 텍스트에 치우친 책이니 이상할 것은 없다. 뒤늦게 호기심이 생겨 옛 만화들을 챙겨보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어디서 이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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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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