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6.24 조회수 | 2,076

화 나 있을 때 가장 재밌다! 성차별적 아이디어에 대한 분노

1994년, 하이텔 과학소설 동호회의 번역모임 ‘멋진신세계’에서는 ‘세계여성소설걸작선’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을 냈는데, 이 제목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타협의 결과로,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았다. 여기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20세기 영미권 여성작가들(그리고 존 발리)가 쓴 SF였으니까. 하여간 괜찮은 책이었다. 저작권료가 작가들에게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이 두 권의 책에서 가장 작품이 많이 수록된 작가는 조애나 러스였다. 세 편이 수록되었는데, 당시 과학소설 동호회 회원으로 ‘멋진신세계’ 근처를 얼쩡거리던 내 입김이 반영되었던 건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하여간 내가 알기로 그 작품들은 러스의 첫 한국어 번역본 또는 번역본 중 하나였다. 그 이전에 나온 번역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 뒤로 26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야 조애나 러스의 첫 단행본의 번역서가 나왔다. 더 일찍 나왔어야 했고, 그 첫 책이 픽션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며, 그 동안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혁명하는 여자들>에 수록-편집자 주) 이외의 다른 단편들이 조금 더 번역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 동안 웬만한 대표작들이 번역된 어슐러 르 귄과는 달리 러스는 그리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가가 아니다. 대표작인 ‘여성인간’을 추천해도 ‘지나치게 거칠고 난폭하다’는 대답을 꽤 여러 번 들었다.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단점일까. 르 귄과는 달리 장편 대표작이 많지 않았고 지병으로 후기엔 작품 활동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핸디캡이었던 것 같지만. 다행스럽게도 ‘여성인간’은 내년에 번역서가 나올 예정이다.

책 이야기를 하자. 제목은 <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이고 원제는 ‘To Write Like a Woman: Essays in Feminism and Science Fiction’이다. 원제가 조금 더 정확하다. 이 책에서 러스는 페미니즘과 SF에 대해 이야기하며 둘은 종종 겹치지 않는다. 1995년에 나왔지만 수록된 에세이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쓰였다.

저번에 소개했던 르 귄의 <밤의 언어>처럼 1970년대라는 시대가 반영된 책이다. 막 SF라는 장르가 진지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고, 여성 작가들이 이 장르 안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페미니즘이 부상하기 시작했던 때. 책 초반의 ‘SF의 미학에 관해’, ‘사변: SF에서 가정이란 무엇인가’, ‘신비화로서 SF와 테크놀로지’는 당시 러스가 비평가로서 했던 장르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 중요한 글이다.

단지 두 작가의 위치는 다르다. <어둠의 왼손>을 쓴 작가 르 귄과 그 책을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비판했던 비평가였던 러스의 위치를 생각해보라. 시대를 느릿하게 따라가는 르 귄과는 달리 러스는 종종 타고 온 타임머신이 고장나 1970년대의 갑갑한 세계에 갇힌 21세기인처럼 보인다. 윌라 캐더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봐요, 어느 각도로 봐도 이 작가는 동성애자인데?”라고 외치며 혼자 갑갑해하는 러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은 캐더의 책을 퀴어 관점에서 해석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 세상이 좀 나아졌다고 할까.

르 귄과는 달리 러스는 분노와 짜증을 감추지 않는다. 늘 조금씩 화가 나 있고 솔직히 말하면 러스의 글은 화가 나 있을 때 가장 재미있다. ’사랑은 여자를 정복한다-SF에서 일어난 성전쟁’은 여성만의 세계를 다룬 SF 단편들에 대한 글인데, 끔찍하면서도 재미있다. 끔찍한 이유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같은 예외적인 작가들의 작품들을 제외하면 이들 대부분이 역겨울 정도로 성차별적인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고 재미있는 이유는 이들을 작정하고 불사르는 러스의 분노에 찬 반응이 신나기 때문이다. 이 분노는 할란 엘리슨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를 비판한 ‘소년과 개 최종 해결’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꼭 SF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제인 에어>와 <레베카>의 영향을 받은 모던 고딕 장르, 윌라 캐서의 작품들, ‘누런 벽지’(<세계 호러 걸작선 2>에 수록-편집자 주) 역시 러스의 관심 대상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캐서의 몇몇 소설들과 ‘누런 벽지’는 예습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안 읽어도 큰 상관은 없는 것 같다. 특히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하는데 그게 내 남편인 것 같아: 모던 고딕’은 언급된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아도 배꼽을 잡으며 읽을 수 있다.

픽션보다 비평서가 먼저 나온 게 아쉽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비평가 러스는 뉴웨이브 SF 단편작가였던 러스보다 훨씬 접근성이 높다. 퀴어였고 페미니스트였고 무엇보다 대놓고 덕후였던 이 심술궂은 작가의 캐릭터를 먼저 알아두고 그 다음에 픽션으로 넘어가도 나쁠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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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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