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5.20 조회수 | 1,528

이 외계인들이 서구권 영어 대중음악밖에 모르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은, SF가 머나먼 미래나 머나먼 다른 별을 무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그리고 대체로 틀린 부분이 더 많다.

일단 가장 기본적인 것들. SF라고 꼭 머나먼 미래나 다른 별을 무대로 할 필요는 없다. 이 장르에서 소재와 무대로 쓸 수 있는 건 그 이외에도 많으니까. 그리고 머나먼 미래나 머나먼 별이 나오는 작품들의 배경이 정말로 머나먼 미래나 머나먼 별이라는 법은 없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여러분이 아주 고지식한 하드 SF 작가여서 실재하는 별을 배경으로해서 아주 엄격하게 천문학과 물리학의 법칙을 지켜가며 작품을 썼다고 해보자. 아마 그렇다면 그 작품의 무대는 정말로 어느 정도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렇다. 무리는 정말로 우리가 사는 세계로부터 떨어질 수 없고 결국은 지금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 소설은 십중팔구 지구인일 것이고, 배경이 되는 먼 미래는 지금 이 시기의 사고 방식과 고민을 갖고 있을 것이고, 주인공이 만나는 외계인도 은근히 지구인을 닮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소망과 공포를 반영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 재미가 없어진다. 우리는 아무리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멀리 가도 결국 우리의 이야기를 듣길 바란다.

그보다 융통성 있는 SF들은 더 지구에 가깝다. 초광속 우주선을 가진 군대가 우주전쟁을 하는 내용을 담은 대부분 스페이스 오페라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금 더 현대로 가도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이다. 아무리 미래적인 무기로 무장한다고 해도 이들의 정치와 고민은 우리가 익숙한 과거와 현재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다. 전 은하계가 식민화된 은하제국 배경의 소설이나 영화를 보자. 그렇게 많은 별들이 무대인데 왜 다들 지구 어딘가 같고, 왜 별들은 단 하나의 기후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우주는 대부분 지구의, 그것도 서양의 과거에 스테로이드를 주입한 버전 같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이 당연한 사실을 그냥 인정하고 글을 써보는 게 어떨까?

캐서린 M. 발렌티의 <스페이스 오페라>는 이를 인정한 부류의 소설에 속한다. 다시 말해 광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직통 후배다. 이 소설은 모두 영어권 코미디언이 목소리를 더빙한 머펫 인형 같은 알록달록한 외계인들이 부글거리는 곳이다. 그리고 제목 같지도 않은 <스페이스 오페라>는 당연히 농담이다.

소설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은하계 전체를 뒤덮었던 우주전쟁이 끝났다. 우주의 지적 생명체들은 또다른 전쟁을 막기 위해 우주 음악 경연 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 꼴찌를 한 행성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운 없게도 지구가 이들의 눈에 뜨이고 한물간 록그룹 ‘앱솔루트 제로스’가 지구 대표로 선정되어 대회에 참여한다.

왜 이 외계인들은 서구권 영어 대중음악밖에 모르는 걸까? 왜 이들의 지구 음악에 대한 지식은 1990년대 뉴욕 타워레코드 1층에 쌓였던 CD 리스트 같아 보이는 걸까. 불평하기 전에 잠깐. 어디서 익숙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렇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은하계 버전을 머펫 인형으로 재현한 것에 가깝다. 심지어 소설 챕터 제목들도 대회 출전곡에서 따왔다. 작가 발렌티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팬으로, 이 행사가 있을 때마다 트위터로 중계를 하는 모양이다. 궁금하시면 작가의 트위터 계정(@catvalente)을 직접 구경해보시라. 참, 아시다시피 올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역사상 최초로 취소가 되었고 이 분 약간 패닉 상태이다.

당연히 이 소설은 우주나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를 입고 이 장르의 클리셰를 재료로 쓴 옛 시대 록그룹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온갖 역설과 변설로 가득 찬 외계인들의 역사와 해설 역시 지구나 지구인이 아닌 것에 대한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열성 팬인 SF 작가가 준비한 가장 무도회이다. 그러니 주인장이 마련한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파티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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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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