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4.01 조회수 | 1,513

‘시대의 규정을 넘어설 것!’ 한 시대 대표하는 작가의 조건

1920년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 출판된 해이다. 이는 올해가 에르퀼 푸아로의 데뷔 백주년이 되는 해란 뜻이기도 하지만, 소위 추리소설의 황금기가 100주년을 맞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적어도 <블러디 머더>의 저자 줄리언 시몬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이 독창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철저히 수수께끼 이야기일 뿐 등장인물과 어떠한 감정적 연계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중략) 반면 크리스티의 첫 책은 탐정 소설을 오직 순수하고 복잡한 수수께끼로만 여기는 시대, 등장인물의 운명에 대한 관심은 불필요한 것을 넘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시대를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그것은 이른바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현장에서 역사의 흐름을 직접 보아온 전문가가 이렇게 말했다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할 수밖에. 분명 크리스티의 첫 작품을 시작점으로 잡으면 경계선을 긋기가 쉬워진다. 하지만 문학사에서 그렇게 분명한 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황금기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시기라면 더욱 그렇고.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은 지금 이 시점에서 보았을 때 당시 장르가 특정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안내판일 뿐 시조는 아닐 것이다.

오늘 소개할 책은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 아니다. 이 책은 10월에 다시 다루기로 하자. 오늘의 책은 시먼스가 <블러디 머더>에서 ‘평범급’이라고 가볍게 평하며 (시먼스는 프리먼 윌슨 크로프츠도 여기에 분류했는데,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평범급의 최고라고 칭찬해주긴했다.) 이름만 간단히 언급한 J. S. 플레처라는 작가의 <미들 템플 살인사건>이다. 이 책은 1919년에 나왔으니 출판년도만 따진다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보다 1년 앞선다. 하지만 이 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첫 소설을 몇 년 전에 썼고, 플레처는 당시에 이미 경력이 꽤 있는 작가여서 순서가 계속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무엇보다 이 비교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크리스티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지만 플레처는 거의 완벽하게 잊혔다. 다행히도 우리는 저작권이 풀린 소설이 인기나 평판과 상관없이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불완전한 영생을 누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중 일부가 이렇게 전자책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것이고.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스파고라는 신문기자가 퇴근하다가 살인사건의 현장을 보게 된다. 피해자는 50~60대의 평범한 노인으로, 신원을 알 수 없고 가지고 있는 물건도 강도질 당한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 단서는 젊은 변호사의 이름이 쓰인 종이 조각뿐. 흥미가 당긴 스파고는 수사에 나선다.

스파고의 수사는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 유능하고 집요한 탐정이고, 이 사람의 수사는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기 직전까지는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는다.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좀 급작스럽고 해설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우리가 그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까 큰 흠은 없는 소설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시먼스가 지적한 황금기 소설의 특징과 비교적 잘 맞아떨어진다. 적어도 ‘등장인물의 운명에 대한 관심은 불필요한 것을 넘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시대‘의 작품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특별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우선 살인사건 자체가 관심을 끄는 구석이 별로 없다. 플레처는 계속 호들갑을 떨며 이 사건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지 알리려 하지만 나 같은 독자 눈에는 그냥 흔한 강도 살인사건처럼 보인다. 그 뒤엔 분명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소설의 도입부는 그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내지 못한다. 그건 아무런 개성도 없는 스파고라는 탐정도 마찬가지다.

수사 과정 역시 평탄하기 짝이 없다. 스파고에겐 명탐정의 통찰력이 없다. 소설의 수사과정은 단서들로 이어진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 단서를 하나 찾으면 증인이 나오고 그 증인을 만나면 다른 단서가 나온다. 소설이 끝날 무렵엔 살인으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가 완성되는데, 그렇게까지 탐정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든다.

시먼스는 평범급 작가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대부분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었고, 재능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수수께끼 구성력은 조금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얄궂게도 그들은 추리 소설이란 수수께끼 풀이나 십자말풀이와 같은 부류라는 반 다인의 금언을 반 다인보다 더 충실하게 따랐다”. 가차없는 말인데, 적어도 <미들 템플 살인사건>을 쓴 작가에겐 딱 들어맞는다. 아무런 영감도, 독창성도, 발견도 없는, 그냥 무난한 과정만이 존재하는 책. 지나치게 황금기스러운 책이다. 그에 비하면 크리스티가 만들어내는 캐릭터와 수수께끼들은 얼마나 생생한가. 시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작가들은 그 시대를 규정하는 제한을 늘 자유롭게 넘어서는 신선한 책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걸 못하는 사람들이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속 무난한 연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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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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