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2.19 조회수 | 832

몸무게가 계속 줄어드는 남자의 초능력 활용법

<고도에서>는 매년 벽돌만한 책들을 한 권씩 생산해내고 있는 스티븐 킹 선생의 소품이다. 프랑스 장편소설 한 권 분량 정도? 그렇다고 킹 선생이 벽돌 생산을 잠시 쉰 건 아니다. 그냥 작업 사이에 또 시간이 남았었나보다.

책은 리처드 매드슨에게 바치는 헌사로 시작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책은 대놓고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의 설정을 변형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독자가 눈치채지 못할까봐 주인공에게 스콧 캐리라는 이름을 주고 작품 여기저기에 대놓고 표시를 한다. 예를 들어 이런 대사.

“스콧,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원인이 뭘까? 자네…… 뭔가 방사능 같은 걸 쬐기라도 했어? 싸구려 해충 퇴치 스프레이라도 가득 들이마셨나? 생각을 좀 해 봐.”

기성품 아이디어를 자신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것이 스티븐 킹의 장기이니 이는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줄어드는 남자>의 내용은 무엇인가. 방사능으로 오염된 해충 퇴치 스프레이를 맞고 점점 몸이 줄어드는 남자 이야기다. 과학적으로는 수상쩍은 수준을 넘어 그냥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훌륭한 드라마이고 종종 등골이 오싹한 호러이다. 모두 스티븐 킹의 장기이다. 이 정도면 매드슨의 테마에 의한 스티븐 킹의 호러 변주곡을 기대할 법도 하다.

하지만 소설은 의외로 호러가 아니다. 충분히 그 쪽으로 갈 수도 있는데 의외로 안 간다.

일단 설정부터 덜 호러스럽다. 매드슨 소설 주인공 스콧 캐리는 점점 몸이 줄어든다. 하지만 스티븐 킹 소설 주인공 스콧 캐리는 그냥 몸무게가 줄어들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질량 대신 무게만 줄어든다. 주인공이 점점 작아지는 저중력 행성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써놓고 보니 이 역시 그리 말이 되는 상황은 하지만 그래도 킹은 이 책에서 매드슨보다 물리법칙을 보다 그럴싸하게 다룬다.

이런 상황이니 중반엔 소설이 조금 슈퍼히어로 이야기와 비슷해진다. 근육량은 여전하고 몸의 질량도 마찬가지인데 무게는 절반 정도 줄었으니 스티븐 킹의 스콧 캐리는 이전보다 훨씬 좋은 달리기 선수가 됐다. 그렇다면 이 힘을 갖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스콧이 택한 것은 이웃에 사는 레즈비언 부부를 돕는 것이다. 커플의 개가 스콧네 집 앞마당을 더럽히기 때문에 두 집 사이는 아주 좋지 않은데, 두 여자들은 캐슬록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힘들어하고 있고 전재산을 투자한 비건 레스토랑도 잘 되지 않는다. 둘 중 한 명이 전직 육상선수이고 이번에 캐슬록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하는데, 스콧은 잠시 생긴 이 능력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거 같다.

심지어 저번 선거에서 트럼프를 뽑았을 게 뻔한 공화당지지자인 백인 이성애자 중년남자가 위기에 빠진 레즈비언 커플을 돕는다는 이야기이니 이 시혜적인 태도가 간지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 자체는 선하며 무엇보다 스티븐 킹 자신이 레즈비언 딸을 둔 아버지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보호자적인 태도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적어도 설정을 덜 간지럽게 하는 개인적인 감정이 녹아있다.

스콧 캐리의 슈퍼히어로 기간은 비교적 짧게 끝난다. 경기 이후에도 스콧의 몸무게는 계속 줄어들고 몸무게가 0이 되는 시기가 머지 않았다. 매드슨의 스콧도 이 0지점에 집착하는데 나로서는 둘 다 이해가 안 간다. 일단 매드슨의 스콧은 자신이 소멸되는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분자의 크기, 플랑크 상수 같은 이치에 맞는 이유를 들이대기엔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킹의 스콧에게 몸무게가 0이 되는 지점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안 든다. 조금 더 기다려보면 몸무게가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앞으로 남은 경험을 이렇게 빨리 포기하려 하지?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기엔 이 사람은 아직 젊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킹은 이 이야기를 통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무게로 대표되는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고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을 최대한 아름답고 행복하게 그려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대비하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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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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