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1.08 조회수 | 1,320

‘겨울왕국’을 소설로 만들 때의 문제점


소설을 각색한 훌륭한 영화는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삼투압의 법칙처럼 영화를 훌륭한 소설로 각색하는 걸 막는 힘이 존재하는 것일까?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소설은 개인적인 창작이어야 가장 성과가 큰데, 영화의 소설 각색은 기업 내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영화를 소설로 각색하는 작가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가와 감독보다 대우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가능하다.


오늘 가져온 책은 젠 캘로니타의 <겨울왕국 또 하나의 이야기>다. ‘겨울왕국’의 인기를 등에 업고 나온 수많은 책 중 하나다. 그림책도 있고 만화책도 있고 아트북도 있는데, 이 소설은 ‘만약에?’라는 질문을 통해 ‘겨울왕국’ 1편의 이야기를 살짝 변주하고 있다. “만약에 그 결정적인 날, 안나가 엘사의 초능력에 대한 기억만 잃은 게 아니라 모든 기억을 잃었다면? 그리고 몰래 다른 집에 입양되어 평범한 평민의 삶을 살았다면? 그러다 둘이 다시 만났다면?” 그러니까 디즈니가 원고료를 직접 지불한 팬픽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술술 넘어가는 책이긴 하지만 아주 좋은 소설은 아니다. 단지 여기서 작가 탓을 하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집필 이전에 이 소설에 주어진 조건들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계속 막는다.


가장 큰 문제는 소설이 충분히 변주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본 조건만으로도 이 이야기는 영화와 완전히 다른 길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디즈니는 이 소설에서 여전히 익숙한 재료들을 요구한다. 올라프, 한스, 스벤, 크리스토프와 같은 캐릭터들은 여전히 등장해 주인공과 엮이고 영화와 비슷한 경로를 겪는다. 클라이맥스에서 엘사와 안나가 처음 만나고, 올라프가 안나 대신 엘사를 따라다니는 걸 제외하면 거의 같은 이야기이고 많은 부분은 대사도 같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굳이 다시 할 필요가 있을까? 둘을 비교해보면 영화 쪽의 설정이 더 와닿는데 말이다. 이 이야기는 두 자매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때에 더 잘 먹힌다.


다른 하나는 월드 빌딩과 묘사 문제이다. 영화와 소설은 ‘그럴싸함’의 기준이 다르다. 영화에서는 아무리 세부 묘사나 설정이 이상하다고 해도 시각적으로 그럴싸하게 구현된다면 큰 문제가 없다. 좋은 시각적 스토리텔링을 위해 일부러 개연성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소설은 더 엄밀한 기준을 요구한다. 그 때문에 SF 영화를 각색하는 작가들은 영화의 이상한 설정을 설명하고 보완하기 위해 몇 페이지에 걸친 장황한 설명을 해야 한다.


‘겨울왕국’을 소설로 만들 때 가장 큰 문제는 아렌델이 그렇게까지 자기완결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핏보면 이곳은 공주들이 살고 마법이 남아있는 동화나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렌델은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 감상자들이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수많은 문화적 코드로 구성된 곳으로 동화나라보다는 디즈니랜드에 더 가까운 곳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대착오적이며 이 세계가 자기완결적인 곳이라면 이 영화의 절반 정도가 설명이 안 된다. 옆에 컵홀더가 달린 크리스토프의 썰매를 보라. 그리고 세상에 자기 나라 이름을 위즐타운이라고 짓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영화에서는 이게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이곳은 뮤지컬 코미디의 세계이고 눈사람이 20세기 보드빌 스타일의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도 관객들은 정확한 사실성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하지만 별다른 완충장치 없이 이것들을 그대로 소설로 옮기면 사정은 달라진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교역국인 위즐타운’이라고 말해보라.


분명 이 소재로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고유명사와 기본 설정만을 남겨놓고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했을 것이다. 이 책이 그랬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충실하게 따르며 살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리고 디즈니와 계약관계로 묶이지 않은 팬픽 작가들 중 몇 명은 이미 그 세계로 들어갔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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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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