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19.11.20 조회수 | 2,314

백인 남성 디폴트 거부! 진흙을 몸에 바르는 아프리카 소녀가 주인공인 SF

SF하면 떠오르는 가장 진부한 이미지는 몸에 착 달라붙는 반짝반짝 옷을 입은 백인 남자가 광선총을 들고 끝없이 이어지는 장식없는 금속 터널 안을 걷는 모습일 것이다. 그 터널이 우주선에 있는지 미래 도시 안에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70년대까지만 해도 이는 표준적인 SF적 이미지였다.

모든 SF 작가들의 시각적 상상력이 저렇게 빈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르는 인기있는 이미지에 수렴되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장르에 속해있던 많은 사람들은 문화적 다양성이 위축되고 모든 것이 서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건 그렇게까지 이상한 상상도 아니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지구의 문명은 정말 서구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한복을 일상복으로 입고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지만 세상은 20세기 서구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고, 정말 단순했다고 해도 그 단순함 속에 그대로 거주해서는 안 되었다. 일단 그러면 심심하니까. 그리고 이제 서구문화권 바깥에서도 SF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도 반짝거리는 옷을 입은 백인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 서구식 서사 방식이 SF의 유일한 통로여야 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가. 지구에는 수많은 이야기의 전통이 있다.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지만 나이지리아인 부모 밑에서 자라며 나이지리아 여행을 하며 자란 작가 은네디 오코라포르의 중편 <빈티: 오치제를 바른 소녀>에 반짝이는 개성을 부여하는 것도 비서구적인 개성이다. 일단 제목부터 궁금증을 유발한다. ‘오치제’가 무엇이기에 제목에 나올만큼 중요한 것인가? 검색을 해본다. 오치제란 나미비아에 사는 힘바 부족 사람들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는 진흙으로, 붉은 돌을 갈아 소기름과 섞어 만든다. 이들은 평생동안 물로 샤워나 목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이 배경인, 지구가 거대한 은하 문명에 통합된 먼 미래에서도 힘바 부족 사람들은 이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당연한 것일까? 마을을 떠나 세상바깥에서 살고 있는 힘바 부족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들은 이 설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로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 빈티는 다른 태양계 어딘가 있는 움자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우주선을 탄다. 쿠시족이 대부분인 우주선 안에서 빈티는 유일한 힘바족이다. 그건 빈티가 우주선 안의 유일한 흑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 그렇다고 쿠시족이 백인이라는 건 아니다. 작가의 트윗을 읽어보니 이들은 아랍계로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미래에도 유럽계 백인이 굳이 디폴트여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힘바족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구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고 여전히 부족 체제를 유지하는 모양인데, 그와 별도로 자기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기술 문화를 개발한 모양이다. 이는 수학과 관련되어 있고 빈티 역시 수학 천재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지구인과 전쟁 중인 메두스라는 외계 종족이 갑자기 우주선에 난입해 승객들을 학살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빈티는 이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우주선이 움자 대학이 있는 행성에 착륙하기 전에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주전쟁이 일어날 판이다.

거의 동화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다. 주제 역시 명쾌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편견없이 타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쓸데없는 우월의식을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정체성부터 확고하게 다져야 할 일이고. 빈티는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이 소설에서 정해진 코스를 무사히 완주한다. 그리고 그 완주를 돕는 것은 빈티의 힘바족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외계 종족과 조우하는 항성간 우주선 안에서 붉은 돌을 갈아 만든 이 진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이 주제를 통해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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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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