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18.01.17 조회수 | 2,665

‘여자라서’ 빼앗긴 노벨상...할머니 명예 회복 위해 나선 손녀

1967년의 조슬린 벨 버넬(사진 출처 : www.flickr.com/photos/28695535@N08/5136861403) 

 

마틸다 효과는 같은 업적을 쌓아도 여자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남자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19세기의 여성운동가 마틸다 조슬린 게이지가 처음 지적했고, 과학사가인 마가렛 W. 로시터가 1993년에 이 이름을 만들어냈다.

 

마틸다 효과의 사례는 굉장히 많은데, 그 중 많이 언급되는 경우로 조슬린 벨 버넬의 케이스가 있다. 벨 버넬은 대학원생이었던 1968년에 펄서를 발견했는데, 엉뚱하게도 노벨상을 받은 건 지도교수였던 앤소니 휴이시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말이 많다.

 

엘리 어빙의 동화 <마틸다 효과>에 나오는 조스 할머니의 모델이 바로 조슬린 벨 버넬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악역 스모크 교수의 모델은 어쩔 수 없이 앤소니 휴이시일 수밖에 없다. 휴이시가 스모크처럼 대놓고 뻔뻔스러운 악당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틸다 무어라는 열두 살 여자아이다. 천재발명가인 마틸다는 이미 핸디-핸디-핸드라는 발명품으로 특허를 땄고 국제 특허를 따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마틸다는 이 발명품을 학교과학경진대회에 출품하지만 어린 여자아이가 그런 복잡한 물건을 직접 만들었을 리가 없다는 이유로 형편없는 동급생 남자아이에게 대상을 빼앗긴다. 분노한 마틸다는 가족에게 하소연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양로원에 있는 할머니가 젊었을 때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했지만, 그걸 동료 과학자인 스모크 교수에게 빼앗겼고 며칠 뒤 그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는 것.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마틸다는 할머니와 함께 스톡홀름으로 가서 스모크 교수의 정체를 밝힐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할머니의 여권은 기한이 지났고 엄마 아빠는 당연히 허락을 안 해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에서 노벨상과 과학사회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마틸다 효과>는 마틸다 또래 아이들을 위해 쓰여진 작품으로 현대 물리학의 정신나간 오묘함이나 수상식의 관료주의가 들어갈 틈 따위는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과 사건들은 모두 큰 붓으로 휙휙 휘둘러 그린 캐리커처이고 마틸다와 조스 할머니가 영국을 떠나면서부터 사실주의 따위는 아무 주저없이 갖다 버린다. 그에 대한 약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독자들도 주인공들이 탄 열기구가 에펠탑 꼭대기에 착륙하는 순간 조용히 포기했을 것이다.

 

그 결과물은 1960년대라면 디즈니에서 실사 장편영화로 만들었을 법한 신나는 코미디 액션물이다(책을 읽으면서 마틸다가 반세기 전 전설적인 디즈니 아역배우 헤일리 밀즈를 닮았을 거라고 상상했다). 스모크 교수가 노벨상 수상을 준비하는 동안 마틸다는 도버 해협을 건너려는 수영선수, 프랑스의 영화 스타, 유럽의 긴급수배자, 길 잃은 개, 갑자기 병을 앓게 된 사자, 수상쩍은 어릿광대 등과 만나게 되고 끊임없이 위기에 빠진다. 대부분 이 위기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마틸다는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문제 해결 방법을 쏟아내는 천재 발명가이고 조스 할머니도 노벨상 자격이 있는 천재 과학자이기 때문에. 물론 이들이 생각해내는 아이디어 상당수는 현실성이 심하게 떨어지지만, 우린 이들의 세상이 우리의 우주와 조금 다른 곳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다. 이 이야기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만한 과학적 업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작가는 열두 살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으면서 중요하기 짝이 없는 과학적 업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실제 과학자들의 업적을 훔칠 수도 없고 가상의 과학을 만들 수도 없다. 엘리 어빙은 조스 할머니가 새로운 행성을 발견했다고 설명하는데, 암만 읽어도 이 행성에 대한 설명은 앞뒤가 안 맞는다. 이 모순이 편집 과정 중 지적되지 않았을 리는 없고 일부러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다.

 

번역에서는 두 가지가 걸린다. 중간에 할머니로 오인받는 사람은 프랑수아 베르트랑이 아니라 프랑수아즈 베르트랑이다. 그 사람이 남자였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대놓고 페미니스트 메시지를 흔들고 있는 책을 번역하면서 부부간 대화의 평등성을 지키지 못하면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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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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