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두근두근 자동차톡! 등록일 | 2012.06.25 조회수 | 108,048

[튜너] 피아노 조율만큼이나 섬세한 자동차 미학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엄청나게 넓은 전시관, 아침나절부터 광활한 전시관 안팎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비큐 냄새, 번쩍이는 크롬 장식들과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굉음, 거기에다 커다란 젖가슴을 흔들어대며 연신 미소를 날려 보내는 미녀들까지……!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든 인파에 떠밀려 다니다가 기다랗게 늘어선 줄과 맞닥뜨렸다. ‘뭐지?’ 일순간 호기심이 동했다. 어림잡아 100명은 족히 넘을 듯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이어리나 포스터를 하나씩 들고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흥분된 표정이었고 들뜬 목소리로 주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청난 인파에 떠밀리는 사이 아침에 계획했던 스케줄은 일찌감치 뭉개졌고, 문화적 충격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일단 그 긴 대열에 합류해보기로 했다. 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줄이죠?”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답했다. 캐롤 쉘비, 쉘비가 왔다고요! 사인 받아야죠.”

 

↑ 전설의 튜닝카, 쉘비 GT500의 포스 넘치는 디테일

 

캐롤 쉘비? 코브라 브랜드를 만든 미국의 전설적인 튜너? 그가 왔다고?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했다. 다들 왜 그런 표정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가방을 뒤져 깨끗한 종이를 한 장 꺼내들고 그들과 똑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20분이 흘렀다. 옆 사람과 한참 떠들던 아까의 그 남자가 뒤를 힐끔 보더니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하! 그럴 줄 알았어요. 쉘비를 외면할 순 없지.” “당연하죠.”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쉘비 GT500, 정말 죽이지 않아요?” “아, 끝내주죠!” “쉘비 작품 중에 뭘 제일 좋아해요?” “아, 그러니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쉘비는 줄기차게 들어봤지만 그의 차를 몰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니, 몰아보기는커녕 운전석에 앉아본 적도 없었다. 누가 보나 골수 쉘비 마니아임에 틀림없는 그와의 대화를 이어가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머쓱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던 그는 카우보이모자를 쓴 다른 사내를 붙잡고 다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20분을 서 있었지만 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 쉘비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지나갔다. “줄이 왜 움직이질 않죠?” “쉘비 씨가 아직 안 왔어요.” “언제 오나요?” “글쎄, 11시쯤?” 아직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깨끗이 포기하고 줄에서 빠져 나왔다.

 

나를 뺀 그 어떤 사람도 대열을 벗어나지 않았다. 흥분 상태를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그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캐롤 쉘비는 2007년 세마 쇼의 슈퍼스타였다. 팔순 노인 쉘비의 사인을 받기 위해 늘어선 줄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지상 최대의 자동차 부품 전시회인 세마 쇼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에서, 나는 글로만 배우고 외국 기사에서나 읽었던 튜닝 산업의 파워에 기가 눌리고 있었다.

 

미국 튜닝시장은 310억 달러(약 34조 5743억 원) 규모! 미국이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미국 자동차산업이 그토록 엄청난 위기를 겪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막강한 애프터세일즈 시장에서 나온 것이다. 난생 처음 가본 2007년 세마 쇼에는 2천여 개 업체가 참가해 모두 8천 개 이상의 부스를 마련해놓았다. 부스 한 곳 당 1분씩만 잡아도 모두 훑어보는 데 꼬박 닷새가 걸리는 엄청난 규모다. 디트로이트의 빅3 본거지나 일본 토요타 본사, 말레이시아 세팡 F1 서킷, 독일 볼프스부르크의 폭스바겐 본사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가공할 에너지가 라스베이거스 시내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곳은 자동차산업과 소비자들 간의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브라부스 로켓. 메르세데스-벤츠의 전문 튜너인 브라부스가 CLS를 베이스로 제작했다.

 

자동차기자 초년병 시절, 가장 큰 업무 중 하나는 매달 외신을 열심히 뒤져 세계 각지 유명 튜너들의 뉴스를 모으고 번역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나름 모태 자동차 마니아를 자처하고 있었지만 튜닝에 대해서만큼은 지식이 모자랐던지라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하만브라부스, 겜발라 같은 세계적 튜너들의 소식을 정리하는 재미에 푹 빠지고 말았다. 1년 정도 계속하다 보니 각 튜너들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고, 더불어 수시로 등장하는 각종 용어를 정리하는 사이에 절로 유식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튜닝이라고 하면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우리 정서상, 그리고 어지간한 튜닝 작업은 모조리 불법으로 묶여 있는 우리나라 현실상, 당시만 해도 ‘최고의 튜너’는 그저 다른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아닌 게 아니라 외국의 튜닝산업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보면 튜닝업체의 수는 자동차 생산업체보다 수십 수백 배 많다. 자동차산업과 시장의 출발점이 자동차 제조라면 그 산업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든든한 기둥은 바로 튜닝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튜닝의 목표는 간단하다. 바로 “내 차를 다른 차들과 다르게 만들고 싶다”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기술적으로 혹은 디자인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것.

 

세계 최대 튜닝 이벤트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고 세계적인 튜닝업체들이 미국과 독일, 일본에 집중돼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뛰어난 양산차 제조업체와 활발한 모터스포츠 그리고 전문가적 식견을 갖춘 소비자 등 ‘자동차문화의 3박자’를 모두 갖춘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모터리제이션 초창기부터 일찌감치 소위 개라지 문화(자신의 차고에서 차를 일일이 직접 손보고 다듬는 문화. 차가 곧 생활이 될 수 있었던 토양이다)가 발달해온 미국에서는 자신의 차에 개성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튜닝산업이 발전해왔고, 최고의 자동차 브랜드와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 등 최상의 기반을 갖춘 독일에서는 절정의 고성능에 도전하는 쪽으로 튜닝이 성장해왔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이름난 튜너들은 자동차업체의 자회사 형태로 활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워크스 튜너 AMG의 로고가 새겨진 자동차 실내외 모습

 

튜너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뭐래도 ‘고성능’에 있다. 많은 글로벌 자동차회사들이 내부에 튜너를 두는 이유도 그래서다. 메르세데스-벤츠의 AMG나 BMW의 M, 닛산의 니스모, 혼다의 무겐은 대표적인 워크스 튜너로 꼽힌다. 이들은 자사의 양산차를 소비자들 입맛에 맞도록 다양하게 조율해내는 역할을 한다. 양산차의 기획과 설계, 생산 단계에서부터 관여하기 때문에 튜닝 완성도가 높고 애프터서비스까지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 브랜드 차에 가장 최적화된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게 매력이다. 2004년, 메르세데스-벤츠 SLK를 시승하러 스페인에 갔을 때 자투리 시간을 틈타 잠깐 타봤던 C 63 AMG에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C클래스의 작은 차체로 폭발할 것만 같은 사운드와 날뛰는 파워를 거뜬히 받아내고 있었다. 경이로웠다.

 

AMG가 메르세데스-벤츠의 워크스 튜너라면, 브라부스는 메르세데스-벤츠 최고의 파트너로 꼽히는 전문 튜너다. 1979년 보도 부시만이 설립한 브라부스는 초창기 S클래스 내외장 튜닝으로 중동 갑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뒤 1980년대 중반 본격적인 퍼포먼스 튜닝을 시작한다. 연구개발센터까지 갖추고 있는 브라부스는 메르세데스-벤츠 CLS를 베이스로 한 튜닝카 로켓으로 최고시속 366km를 기록하기도 했다.

 

메르세데스-벤츠에게 브라부스가 있다면 BMW에게는 하만이 있다. BMW 전문 튜너로 출발해 현재 BMW 최대의 튜너로 활동 중인 하만은 1986년 레이서 출신인 리하르트 하만이 세운 업체다. F3와 독일 DTM 레이서로 20년 넘게 활약했던 설립자 하만은 레이서 경험을 바탕으로 설립 초기부터 엔진과 구동계 튜닝에 손을 대 명성을 얻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튜너들이 있지만 하드코어 마니아들 사이에서 성능에 관한 한 세계 최고로 첫 손 꼽히는 튜너는 바로 겜발라다. 1978년 우베 겜발라가 설립한 겜발라는 1989년부터 포르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포르쉐의 수퍼카 카레라 GT를 베이스로 한 겜발라 미라지 GTR은 1천 마력의 무시무시한 출력을 바탕으로 0→시속 100km 가속 2.8초, 최고시속 410km의 비현실적인 성능을 뽑아냈다. 지난 2010년 설립자 우베 겜발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피살당하는 비극을 겪은 이후 잠시 주춤하고 있긴 하지만 겜발라의 튜닝카들은 여전히 최강의 성능을 인정받고 있다.

 


하드코어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겜발라의 역작, 미라지 GTR

 

자동차가 최고의 장난감이라면 튜닝은 자동차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오락이다. 그리고 실력 좋은 튜너들은 소비자들이 그 오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는 호스트들이다. 하지만 튜닝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실력 좋은 튜너들이 널려 있더라도 사회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백약도 무소용’이다. 특정 자동차회사 전문 튜너를 넘어 자동차회사들과의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 튜너들이 있어 그들의 시장이 무너지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든든한 자동차문화가 있어서 튜닝산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건지, 혹은 튜너들의 성장을 밑거름 삼아 자동차문화가 성숙할 수 있었던 건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자동차 제조업체와 워크스 튜너, 수두룩한 전문 튜너, 그리고 다양한 취향의 소비자들이 촘촘히 얽혀 있는 자동차 선진국들의 구조가 모범답안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국 자동차산업이 치명타를 맞고서도 버틸 수 있었던 힘과 독일 자동차회사들이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에너지, 그리고 상상하기도 싫은 침체의 늪에 빠졌다가도 다시 털고 일어서는 일본 자동차산업의 저력은 모두 제조사와 튜너들이 닦아놓은 튼튼한 산업구조에서 나온다. “한국은 자동차 강국이면서 왜 튜닝을 그렇게 규제하느냐”며 다그치던 세마 쇼 홍보담당자의 사나운 눈빛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른거린다.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차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지금의 오토모빌 키드들이 사회의 중심축이 되는 날에는 닛산의 니스모처럼 현대의 워크스 튜너가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초심으로 되돌아가서 나도 튜닝 공부나 다시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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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우성

책 읽고 글 쓰고 자동차 구경하는 재미로 유년기와 청년 시절을 보내고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만만찮은 사회생활에 허덕이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진정 행복하겠다’는 희망에 기대어 어느 날 갑자기 자동차잡지 기자로 전직한다. 간혹 직업이 되어버린 취미에 치를 떨 때도 있지만 마음껏 차를 타고 원 없이 글 쓰는 호사를 벌써 13년째 누리고 있다. 월간 <카비전Car Vision> 기자와 월간 한국판 편집장, 조선매거진㈜ 기획취재팀장을 거쳐 지금은 월간 한국판 편집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이 칼럼은 수퍼카, 디자이너, 플랫폼, 하이브리드, F1 등 30가지 자동차 키워드에서 출발해 세계 자동차문화의 가장 뜨겁고 환상적인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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