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1.02.10 조회수 | 1,835

공포와 고통이 당연시되는 세계...그럼에도 이 소설이 밝고 씩씩한 이유

맷 러프의 연작소설집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의 첫 주인공 애티커스 터너는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SF팬이다. 소설이 시작되면 애티커스는 낡은 염가판 책들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에서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연대기>를 꺼내 읽는다. '하늘 높은 곳의 길' 챕터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했지만 책은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너무 뻔한 묘사는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늘 높은 곳의 길'은 로켓을 타고 화성으로 이주하는 미국 흑인들의 이야기다. 당시 미국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선의로 가득 찬 단편이지만 당시 미국 백인 남성작기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시혜적인 입장과 편견 역시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리고 소설에서 동시대 독자로 설정되어 있는 애티커스는 흑인이다. 소설의 시대배경은 오로지 백인남자만이 SF장르물의 주인공이고 작가이고 독자라고 여겨졌던 시대다. 자신이 사랑하는 장르에 삼중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팬의 입장을 상상해보라. 어렵지는 않다. 여러분이나 나도 그렇게까지 주류는 아니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이 들어가지만 크툴루 유니버스를 배경으로 한 정통적인 러브크래프트 소설은 아니다. 그보다는 러브크래프트가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극도로 인종차별적인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이야기가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나올 법한 SF/판타지/호러라고 설명하면 될까. 인종차별과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이 한 문장에 들어갔으니 어두컴컴한 이야기일 거라고 상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여기엔 긴 설명이 필요하다.

소설에 묘사되는 흑인들의 삶이 끔찍한 건 사실이다. 애티커스와 주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고 교육 수준도 높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달라지는 건 없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흑인으로만 보고 다양한 차별 행위가 따른다. 이들은 이미 공포와 고통이 당연시되는 바닥에 있다. 애티커스의 가족은 짐 크로 법 시대 남부를 여행하는 흑인들을 위한 안내서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이 세계로 꾸준히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 영화 '그린북'의 세계이다.

자, 이제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논리를 보자. 이들 소설의 논리는 겁쟁이 주인공이 백인 남자이고, 언제 부서질지도 모르는 이 남자의 연약한 세계를 파괴하려는 모든 존재들은 괴물이라는 것이다. 외계인, 고대 종족, 다른 인종, 외국인, 여자 그리고 해산물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이 세계를 이루는 건 자신이 언젠가 자신의 위치에서 밀려날지 모른다고 두려워한 주류의 공포와 혐오이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의 주인공들에겐 정확히 같은 일들이 다른 식으로 읽힌다. 어차피 지금 세상은 충분히 나쁘다. 세상에 균열을 내는 모든 러브크래프트적인 사건들은 이들에게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주는 모험의 장이다. 이 모험이 모두 악의가 있거나 위선의 가면을 쓰고 이들을 이용하려는 백인들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은 재미있는 아이러니이다. 이 소설에서는 악의가 자주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소설은 의외로 밝고 씩씩하며 진취적이다. 이들은 마법을 쓰고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우주로 나간다.

여기서 작가의 인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맷 러프는 백인이다. 백인이 흑인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특히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와 같은 SF/판타지/호러는 아이디어를 먼저 낸 사람이 임자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소설이 나오면 그래도 작가의 위치가 소설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보다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소설은 백인 캐릭터들에게 가차없긴 하다. 하지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악당 케일럽 브레이스화이트는 조금 애매하다. 얄팍한 위선자이고 늘 주인공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하는데, 이를 통해 주인공들에게 꾸준히 신나는 모험의 기회를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꾸준히 비판의 대상이 되는 ‘백인구원자’를 희화화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 맷 러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작년에 텔레비전 시리즈로 각색되었다. 드라마 '언더그라운드'의 각본을 쓴 미샤 그린이 쇼러너(제작 총책임자-편집자 주)이고 영화 '겟 아웃'(이 작품도 아이디어를 보면 은근히 이 소설과 가깝다)의 조던 필이 제작자다. 그러니까 두 흑인 창작자가 개입하면서 ‘흑인 인증’을 받은 것이다. 원작과 각색물을 비교하는 것도 유익한 작업일 듯 하다. 소문을 들어보면 드라마가 더 어둡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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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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