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1.15 조회수 | 1,558

이 세계가 복사본이라면? 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가이드

현대인 또는 미래인이 과거로 돌아가 자기만 가진 지식으로 과거 사람들을 지도하거나 정복하는 이야기는 흔해 빠졌다. 이 장르의 시작은 아무래도 마크 트웨인의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일 것이다. 19세기 공장 기술자가 아서왕 시절 과거로 돌아가는데 생전에 거의 19세기 수준의 기술을 이룩해낸다. 아쉽게도 타임 패러독스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막판에 도로아미타불이 되긴 한다. 마크 트웨인 시대엔 아직 평행우주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SF장르가 완성되자 비슷한 아이디어를 다룬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요새는 좀 지나치게 인기를 끄는 느낌이다. 평범한 아무개가 과거로 돌아가거나 과거 비슷한 다른 세계로 돌아가 영웅이 되고 어쩌고 저쩌고. 다 현실세계에 대한 혐오와 도피의 절실함 때문이겠지만.

그런데 이게 얼마나 말이 될까?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세계에선 더더욱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세계에 떨어져도 주인공보다 똑똑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갖고 있는 미래 지식은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과연 그걸 무기로 그 세계를 이끌고 지배할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 현실 세계에서 그렇게 죽을 쑤고 다녔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머리를 한참 굴려 봤는데, 나 같으면 내 한줌 정도의 지식을 움켜쥐고 나보다 더 주인공 같은 사람을 찾아 보호를 요청할 것 같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다.

라이언 노스의 <문명 건설 가이드> 제목 앞에는 ‘길 잃은 시간여행자들을 위한’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이 책은 논픽션이긴 한데, 어느 정도는 SF의 틀을 빌리고 있다. 미래에 발명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여행자들이 기계 고장으로 과거에 갇혔을 때 혼자 힘으로 문명을 건설할 수 있게 돕는 가이드인 것이다. 노스는 그 책을 땅 속에서 발굴했는데 그 가이드의 저자 이름도 라이언 노스라고 우기는 것이고.

가이드가 커버하는 영역은 광대하다. 언어의 발명부터 시작해서 컴퓨터의 발명까지 커버한다. 물론 이 모든 걸 한꺼번에 다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과학기술은 다른 기술과 연결되어 있고 시간여행자는 이 복잡한 그물망을 맨손으로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 그 세계에 어느 정도 안정된 기술이 있다면 앞을 건너 뛰고 다른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이는 대략 인류의 기술사와 겹치는데 책은 이를 아주 충실하게 따르지는 않는다. 저자(그게 실제 라이언 노스이건 이 가이드를 썼다는 미래의 라이언 노스이건)는 21세기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중간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종종 시대를 건너뛰어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옛날 사람들은 항해 중 정확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정교한 시계인 크로노미터를 발명한다. 이건 엄청나게 힘든 작업으로 (데이바 소벨의 <경도>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시간여행자가 대충 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굳이 그 길을 갈 필요가 없다. 무선 통신을 발명해 육지와 연락을 취하는 것이 훨씬 손쉽기 때문이다!

읽다보면 이 책 한 권만으로 몇 천 년 동안 우리가 쌓은 기술 역사를 비교적 빨리 구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여행자의 평생만으로는 당연히 모자란다. 혼자서 정보를 독점하고 신 흉내를 낸다면 더욱 어렵고.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책의 내용을 공유하고 든든한 협조자를 만난다면 몇 백 년 안에 상당한 성취를 이룰 것 같긴 하다. 그와는 별도로 백지 상태에서 문명을 재건하려는 시간여행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작가는 반드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 책의 내용을 다 반영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뭐가 가능하고 뭐가 불가능한 것인지는 알고 시작하는 게 좋을 테니까.

아쉬운 것. 석기시대의 기술이 가볍게 다루어진 게 좀 신경쓰인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시간여행자에게 석기시대의 기기 제작법과 기초생존술만큼 유용한 것은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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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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