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등록일 | 2020.01.02 조회수 | 1,081

우울증과 달걀 떨어뜨리기의 상관 관계

끝도 없이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 같은데, 장르의 명칭을 엄격하게 정의해서 장르를 설명하려는 시도처럼 쓸데없는 것은 없다. 장르의 이름은 대부분 그 장르의 가능성이 충분히 탐구되기 전에 지어졌고 엄격하게 정의를 내린 새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곧 그 정의를 위반하고 경계선을 박살내는 작품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SF라는 장르 명칭도 그렇다. 이 장르 명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과학을 다루는 픽션’으로 제한한다면 장르의 수많은 걸작들이 떨어져 나간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하면 과학을 다루고 있지만 절대로 SF는 아닌 수많은 작품들이 쓸려들어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SF가 아니다.

영화 '1년의 9일' 포스터

이런 예로 내가 자주 드는 작품은 미하일 롬이 감독한 60년대 소련 영화인 ‘1년의 9일’이다. 영화는 핵융합을 연구하는 소련 과학자의 1년을 그리고 있는데, SF가 다루는 환상적인 미래 과학 대신 현실세계의 과학을 다루고 이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 때문에 SF에 익숙한 관객들은 좀 갑갑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작품이 주는 감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 감흥의 성격이 SF와 좀 다를 뿐이다.

오늘 태 켈러의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을 가져온 것도 이 책이 과학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SF는 아닌 작품의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읽어보니 기대와는 조금 다른데, 그래도 여전히 좋은 책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내털리라는 중학교 1학년생 여자아이다. 엄마는 식물학자이고 아빠는 상담사다. 엄마는 직장에서 해고당한 뒤 우울증에 빠졌다. 엄마를 해고한 상사가 한 때 단짝 친구였던 아이의 아버지여서 내털리의 학교 생활은 이전보다 복잡해졌다. 내털리는 열정이 조금 과한 과학교사 닐리 선생의 제안으로 달걀 떨어뜨리기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만약 성공해서 상금을 탄다면 그 돈으로 멕시코에 가서 온실에 죽어 있는 코발트블루 난초를 대체할 새 난초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계획에 새 단짝친구인 트위그와 학교 과학 영재인 다리가 가세한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달걀 떨어뜨리기 대회의 과정이 조금 더 상세하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일단 작가인 태 켈러와 주인공 내털리가 달걀 떨어뜨리기의 물리학과 엔지니어링에 큰 관심이 없다. 켈러는 어린 시절 실제로 달걀 떨어뜨리기 대회에 나간 경험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 경험은 이야기에 반영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과정을 그렇게까지 깊이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여기서 이 대회에 진짜 관심이 있는 건 다리밖에 없는 것 같다.

대신 소설은 이 깨어지기 쉬운 달걀을 우울증에 걸린 정신의 상징으로 삼는다. 이 소설에서 과학은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달걀 떨어뜨리기의 물리학보다는 식물학, 그리고 현실 세계의 과학자들이 실제로 겪을 수도 있는 문제들과 그로 인한 정신 건강의 문제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드라마도 모녀를 포함한 인간관계의 회복과 유지, 그를 통한 중학생 아이의 성장에 걸려 있다.

소설에서 시선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인종과 문화를 다루는 방식이다. 인종 언급 없이 닐리 선생이 갈색 피부에 민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부분에서는 정치적 공정성을 첨가하려는 리버럴 작가의 평범한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털리 아버지의 또다른 이름이 '영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내털리의 한국인 할머니가 등장하고 다리의 인도계 부모가 소개되면서 인종과 문화의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이를 갖추게 된다. 특히 내털리 가족의 묘사에서는 미국에서 자라는 혼혈 아이의 정체성 문제의 묘사가 불필요한 인종주의의 갈등 없이 섬세하게 들어가 있다. 작가의 차기작인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의 정체성이 조금 더 본격적으로 드러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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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듀나

SF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면세구역>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와 같은 SF 책들을 썼고,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잡글들을 쓰며, 지금은 엔터미디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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